지한은 단이에게 전화한 이유를 자문해 보았다. 그러자 노주와의 이별이 떠올랐다. 헤어지자고 말하며 펑펑 울던 그 모습은 낯선 것이었다. 그녀와의 키스는 매우 불쾌한 경험으로 남아있고 지한은 노주에게 몰입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후각이 간직한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냄새, 그것이었다. 괴물은 그렇게 지한의 추억마저 윤색하고 있었다. 내면의 괴물을 불러내기 직전 왜 노주의 모습이 떠올랐을까. 왜 그녀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했을까. 지한은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단이에게 전화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단이와 함께 가는 게 혼자 기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소래옥에서 돌아온 후 서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곳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지만, 공기는 바싹 마른 솜이불 같은 느낌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자극했던 향기는 다음날 하산하기 전까지도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지한은 그 향기가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아직 몰랐다. 치유 받는 느낌! 지한은 이렇게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내면의 괴물에게 쫓기기도 하고 대항하기도 하면서 지한이 받는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었다. 그러나 소래옥에서의 하룻밤은 불치의 환자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치료법이었다. 소래옥이 부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곳에 가서 치유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지한에게 남겨진 도시에서의 하룻밤은 더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지한과 단이는 지리산 자락을 앞에 두고 차에서 내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굳이 너까지 올라갈 것 없다고 했지만 단이는 막무가내였다. 한 시간쯤 오르자 단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동안 운동했냐?
단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지한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를 뛰쳐나오기 전에는 식은땀 흘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었다. 아무렇지 않게 거친 산을 오르는 지한의 모습은 단이에게 생소함을 넘어 경이에 가까운 것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지한은 남아있던 생 선지를 남김없이 마셨다. 이 정도면 하루 이틀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소래옥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산 중에서 갈증을 해소할 방도가 없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지한은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기대만을 막연하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절반밖에 오르지 않았다. 단이의 속도에 맞추자니 지한은 마음만 급해지고 있었다.
거의 도착할 즈음 소래옥의 향기가 먼저 마중 나왔다. 며칠 전 답사 아닌 답사를 할 때 지한을 치유해 주었던 그 향기였다. 기와를 얹은 고택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파에서 잠들었지만, 심한 갈증에 잠이 깼던 예전 그날 이후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밤을 보냈었다. 지한은 날아오를 듯이 뛰어서 마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날 아침처럼 깊게 심호흡했다. 헉헉대며 따라 들어온 단이는 갑자기 코를 막더니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왜 그래?
비린내 같은 거 안 나냐? 곰팡내 같기도 하고. 햇볕도 하나도 안 들잖아.
...
습기 장난 아니겠는데. 여기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지한은 인간과의 거리가 더욱 벌어졌음을 실감하며 말했다.
벌레는 없잖아.
둘은 청소를 간단하게 끝내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새소리에 실린 계곡의 물소리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마당을 질러가고 있었다. 단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외 발령 났어. 조만간 나갈 거 같아.
잘됐네. 나가고 싶어했잖아. 얼마나 가는데.
3년. 내가 3년 동안 투자하는 셈 치고 저기 산 밑에 집 하나 살 테니까 거기서 사는 건 어때? 여긴 농사 지을 땅도 없잖아. 도대체 뭐 먹고 살려는 거야? 나야 땅값 오르면 좋고 너는 농사라도 지을 수 있으니 좋고.
지한은 못 들은 체했다.
너 내일 출근해야지. 내려가자.
섭섭함에 잠시 침묵하던 단이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저기 볕 좋은 데서 며칠 쉬어가면 좋겠다. 이 집은 말고. 에잇, 그래도 일은 해야지. 내려가서 밥이나 먹자. 아까 역전 지나는데 콩국수 집이 있더라고.
지한은 밥 먹자는 제안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시골 콩국수 집이 의외로 맛있다며 단이는 국물까지 싹 비웠다. 해외 근무 끝나고 돌아오면 여기서 콩국수나 한 그릇 다시 하자는 말을 남기고 단이는 돌아갔다.
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