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변곡점은 사건의 흐름을 뒤바꾸기도 하고 어떤 변곡점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다른 어떤 것은 아예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한다. 바꾸든 바뀌든 상호작용의 결과이고 연속적인 인과관계의 한 마디일 뿐이므로 주체와 객체를 따질 필요는 없다. 수동적으로 살거나 세상과 담을 쌓고 살거나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며 사는 사람들 모두 자연스러운 사회의 톱니바퀴를 구성하는 톱니이고, 그래서 살아있다면 누구나 능동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사에 이름을 올린 위인들은 특출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남긴 족적은 숨이 벅차 따라가기조차 힘겹다. 살아생전 또는 죽은 후에라도 세간의 찬사와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때로 도도한 흐름을 역주행하며 인간사에 되돌이표를 새긴 이들이 있지만, 순기능이나 역기능을 거세한 절대량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도 범접하기 힘든 능력자들이다.
나는 눈높이를 조금 낮추고 싶다. 역사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담론을 정의하기에는, 그리고 시대를 뒤흔든 뛰어난 위인들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따라가 보기에는 쥐콩같은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무리일 뿐이다. 눈높이를 낮춰, 변화의 물결 속에서 그 바닥을 훑고 지나간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그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의 주체였음을, 예전처럼 스스로 확인받고 싶다.
뛰어난 장군 밑에는 잘 훈련된 종마처럼 용감한 군사들이 있고 훌륭한 성군이라 해도 백성이 없으면 한낱 강태공과 다를 바 없다. 패러다임을 바꾼 발견이나 발명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도록 호응해 준 대중이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스티브 잡스의 위대함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로 인해 훔쳐보게 된 현란한 만화경이 비록 그만의 아이디어일지라도, 첫 출시된 아이폰을 사기 위해 줄 지어 선 사람들이 나에게는 더 흥미로운 존재들이자 미래를 만드는 주역들이다. 무엇인가에 매료되고 누군가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특별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지원군이나 조력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수행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각성의 기회가 오면 대중은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게 된다. 그동안 수행했던 조력자나 지원군에서 주력군으로 변모한다. 그것은 종종 거대한 파도 같아서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기존의 체제를 향해 돌진한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사람들 간 첨예한 대립은 무력 충돌을 불러오기도 하고, 언제나 한쪽이 굴복해야만 끝난다. 저항이나 항쟁이라 부르지만 그렇다고 대중의 뜻대로 상황이 변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암울해지기도 한다.
세상은 변화한다고도 하고 발전한다고도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법과 제도의 퇴보를 목도한다. 사방에서 옥죄이는 억압의 칼 밑에 숨죽이는 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임을 체득한다. 희망 섞인 목소리로 외쳐봐도 멍울진 한은 쉽게 풀 수 없다. 하지만 그 시대를 몸소 체득한 사람의 의식은 더는 퇴보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남는다. 잠복기와 분출의 때를 담금질처럼 겪으며 사람의 의식은 불연속적인 성장을 반복한다. 지우기 힘든 슬픔이 남는다면 더욱 강철처럼 단련된다.
내가 오늘을 무탈하게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유산 덕이다. 몇 번이나 질곡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으나, 오랜 기다림의 끝이 승리자의 희열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그들에게 전수받은 삶의 철학을 후손에게 알려야 하는 전달자로서 그 슬픔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