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
밤바람이 쌀쌀하다
얇은 겉옷 한 장 걸치고 산책한다
발걸음 닿는 대로 목적 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집 앞이고
나는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줄곧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바람이 마땅찮다
등짝 따끔거리는 봄볕에 전신을 덥히더니
어디 가서 차갑게 식어 왔느냐
가로등마다 그림자 제각각이어서
사람은 제 갈 길을 잃는다
꽃잎 지는 거리
돌 화단에 앉았다
오늘 같은 밤
감정의 소모만큼 미련한 짓은 없다
착해질 대로 착해진 사람의 걸음이
온전히 집으로 향할 수 있도록
슬쩍 밤바람의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풍화의 과정에 하루를 맡긴 후
꽃잎 지는 길 따라 돌아온 사람을 두고
연민의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다
사람의 하루를 나와 동일시하며
내 안에서 그의 마음을 캐묻는 일을
산책길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은 미풍이 차가운데 어쩌나
밤의 산책로 주변에는 선명한 소리가 있다
가로등 하나는
1분에 한 번씩 눈을 깜빡이는데 그래서 심박 수 한 번 가로등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들린다
아주 먼 곳에서 달려오던 개소리가
여기 오면 쉬어 간다
꽃잎과
사람이 뿌린 감정 서린 낱말들을 주워 담는
빗자루 소리
민망스럽거나 수치스러웠던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소란을 피우는 소리도 더불어 들린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하품 소리는 눈물 찔끔 나도록 슬프다
출구 없는 잡생각일랑 가둬 두고 한 바퀴 더 돌아본다
산책로의 눈높이에 내 눈높이를 맞추고 천천히 걷는다
다른 이에게는 바쁜 출퇴근을 열어 주는 길이고
엄마들에게는 아이의 유치원 통근 버스를 배웅하는 길이다
오늘 밤 무심결에 걸었다는 이유로
내 산책로가 되었다만
내일은 냉정하게 작별할지 모른다
상쾌한 심호흡에 깊게 중독하면 잠은 다 잤다
메타세쿼이아 닮은 아파트들
그 사잇길에 피톤치드 어우러진 상상이 하품 소리를 쫓아낸다
유통기한 2시간짜리 도파민에 걸려들었다
피곤했던 하루가 완전히 지워지고 이제서야 하늘을 올려 본다
잠이 달아나 달도 말똥말똥하다
자정이 되자 바람은 신데렐라처럼 사라졌다
아파트 뒷길에서 배회하는 바람의 자투리만이
땅바닥을 낼름 핥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