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한 뒤론 쭈욱 <투어리스트 캠프>에서 지냈습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지나 중국으로 넘어갈 작정이었는데, 중국대사관에서 비자를 신청하고 받으려면 최소 일주일은 기다려야 된다고 하더군요. '안 그래도 없는 돈에 일주일 아니 재수 없으면 열흘은 더 이슬라마바드에서 묵어야 한다니! 히말라야의 훈자마을이라면 몰라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흘이나!'
1달러도 되지 않는 이용료만 내면 텐트가 없어도 지낼 수 있는 투어리스트 캠프를 찾아낸 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텐트를 치고 지낼 수 있는 숙박비에서 단돈 몇 백원만 더 얹으면 오두막에서 지낼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난 침낭 하나 달랑, 텐트조차도 갖고 다니지 않았으니 당연히 오두막이지요. 근데 오두막이란 게 말이 오두막이지 그저 문 하나 창 하나 달려 있는, 그냥 콘크리트집입니다. 화장실은커녕 침대도 없고, 테이블도 없고, 심지어 바닥엔 장판이나 마루 조차도 깔려 있지 않았습니다. 완전 '콘크리트 사각형' 속에 들어가 지내는 셈이지요.
'그래도 밤이슬과 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게 이게 어디야!'
투어리스트 캠프에서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면 호수가 있었습니다. 이란에서부터 동행한 폴란드 친구 폴과 함께 수영을 하거나, 독일에서 온 히피 할아버지로부터 원시 하시시 제조법을 배우거나, 이라크에서 탈영해온 젊은이를 위로해주거나, 동남아 일대를 여행하고 온 이탈리아 배낭여행자의 허풍을 들어주거나, 히말라야에 사는 전설의 구루 바바지를 찾아다닌다는 일본청년의 황당한 얘기를 들어주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숲 속 오두막에서 잠이 깬 늦은 아침. 침낭 밖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잉잉거리는 소리가 그저 간밤에 듣던 음악의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은 탓이라 여기며 뒤척거릴 때였어요. 곁에 누워 있던 폴이 나지막하게 묻더군요.
"R, 일어났어?"
"으응..."
"문제가 발생했어."
"뭐, 전쟁이라도 터졌어? (침낭을 후딱 뒤집고 일어나려는 찰나)"
"안 돼! 일어나지 말고 천천히 침낭 밖으로 얼굴만 내밀어 봐."
늘 조심하는 성격이긴 해도 긴장하지 않는 폴의 목소리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죠.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구나 하고 짐작은 했지만 침낭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바라본 세상은, 이런 세상을 내 눈으로 목격하게 되리라곤 꿈에서조차 떠올린 적 없는 그런 광경이었습니다.
잉잉...잉잉...잉잉....
천장부터 방안을 둘러싸고 있는 콘크리트 벽마다 수천 마리 벌들이 빼곡이 달라붙어 있었고, 나머지 수백 마리 벌들은 잉잉거리며 천장이며 벽이며 유리창 할 것 없이 온몸을 부딪치며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 이런 젠장! ‘벌이 잉잉대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한 녀석이 대체 누구였더라?
나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집 짓고
아홉 이랑 콩을 심고, 꿀벌 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으리
또 거기서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리 우는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한밤은 희미하게 빛나고, 대낮은 자줏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그 와중에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의 싯구가 떠오르다니, 헛웃음이 나더군요. 하긴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시집 <첫사랑>에 수록된 예이츠의 시를 늘 읊조리곤 했으니까요.
"벌들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으리, 벌들 잉잉대는 숲 속에 홀로 살으리."
예이츠는 월든 호숫가에서 지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본받아 아일랜드 로크길 호수의 작은 섬, 이니스프리에서 살고 싶어 했다지요. 그러나 한가롭게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시나 떠올릴 사정이 아니었다. 침낭으로 다시 얼굴을 뒤덮고 잉잉대듯 폴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벌들이 모두 다 빠져 나가고 나면 널 깨우려고 했는데 벌써 1시간째 저래. 나가긴 고사하고 깨진 유리창으로 별이 계속 들어와. 저 녀석들은 그냥 벌이 아냐, 말벌이라고. 까닥 잘못하다간 우린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그냥 누워서 기다릴까?"
"여긴 우리 두 사람 밖에 묵지 않는데 누가 오겠어?"
"그럼 소릴 질러서 사람들을 불러볼까?"
"R, 이 안에서 우리가 소리를 지른다고 그 소리가 사무실까지 들리겠어? 게다가 그 소리 때문에 말벌이 침낭 속으로 달려들면?"
"................"
뾰죡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말벌이 잉잉대는 곳’에서 탈출하기 위한 묘책을 강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 침낭 을 덮어쓴 채 최대한 빨리 뛰쳐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한 후, 하나, 둘, 셋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고 달려 나가는 것.
"폴, 근데 설마 바깥에서 누가 문을 잠그지는 않았겠지?"
"설마!"
"알 수 없지(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한국 속담도 있는데...)"
"자아, 하나, 둘, 세......"
"근데, 셋 하고 나서 뛰는 거야 아니면 셋 하면서 뛰는 거야?"
"젠장!"
침낭으로 온몸을 감싸고, 문을 열어젖히고, 사정없이 내달렸습니다. 스무 걸음 정도 내딪고 생각했습니다. '무사하겠구나.' 그래서 "휴우 살았구나!" 하고 한숨 쉬며 속도를 늦쳤습니다. 안도를 했던 건 순전히 오산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총알이 아킬레스건을 관통한 듯한 통증을 느끼며 풀숲에 그대로 고꾸라졌습니다.
내 생애 처음 말벌에게 쏘인, 그래 ‘첫 경험’이었죠. 더듬더듬 머리 위로 잉잉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풀 숲에 누운 채 옆에 널버러진 침낭을 끌어당겨 몸을 숨겼습니다. 벌이 잉잉거리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간이 한참 지나 폴이 캠프 사무실 직원을 데리고 나타났죠. 캠프 직원은 곧 벌떼 소탕작전에 들어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왜 말벌이 우리 오두막으로 몰려든 것일까? 말벌도 톰 웨이츠를 좋아하는 것일까?' 지난밤 내내 틀고 잠들 때까지 듣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수섬>을 읊조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지요.
뭐, 벌이 잉잉거리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Written by @roadpherom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