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손톱을 깎으며 문득 방바닥에 널브러져 한때 내 신체발부였던 조각들을 묵묵히 수렴하고 있는 묵은 신문의 한 칼럼을 보게 되었습니다.
날짜는 무려 2017년 11월 3일. 한국경제신문. 문득 시선에 ‘한경에세이’란 칼럼이 보이고 그날의 에세이 제목은 ‘나눔교육’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심이 좋은 나라는 어디일까.”로 시작하는 글의 첫 단락은 영국자선지원재단(CAF)이 세계 139개국을 대상으로 나눔지수를 조사한 결과 미얀마가 나눔지수 1위이고, 상위권에 랭크된 나라들이 대부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이라크 같은 나라란 것을 알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이 진행돼가며 필자의 논리는 우리나라가 언급한 나라들보다 한참 뒤처지는 세계 62위 나눔지수를 기록한 원인이 산업화의 영향이란 것입니다. 산업화 이전만 해도 두레, 품앗이 등으로 우리도 나눔의 문화가 일상화 되었었는데 그만 산업화로 인심이 각박해지고 핵가족화가 가속화되며 인간에 대한 정이 사라진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필자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나눔교육포럼’이 앞장서 나눔교과서를 제작해 일선 학교에 배포하고 나눔정신을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단 것이었습니다.
물론 공동체에서 나눔의 정신은 중요하고 기업의 회장이 앞장서 이런 단체를 설립해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과연 우리는 이 에세이를 읽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독자의 본분을 다한 것이라 치부해야 할까요?
우선 영국자선지원재단이란 단체의 성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나눔지수 상위권에 랭크된 나라들의 면면을 보면 선뜻 이글의 주장에 동조할 수 없는 것은 저만의 결벽증 때문일까요.
우리가 못살던 50, 60년대 생활상이 문득 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좁은 골목길 두, 세평 남짓한 구멍가게 문 앞 평상에 올라앉은 마을 아저씨들이 해떨어지기 전부터 쓴 소주잔 기울이다가, 마침 퇴근하는 동네 새신랑을 보곤 “어이 김 씨, 와서 한 잔해!” 외치면 그 김 씨는 쭈뼛거리며 평상 끝에 걸터앉아 밥뚜껑에 따라준 소주 한 잔 들이키곤 캬! 하는 희열인지 고통의 곰삭힘인지 모를 외마디 탄성을 내뱉고 굽지도 않은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아저씨들의 빈 잔을 채우던 광경.
김장철이 되면 동네 아낙들이 각자 포깃수가 많건 적건 간에 한 집에 모여 다함께 김장을 담구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기억.
돌이켜보면 참 정겨움이 넘치던 시절이었지만 그 시절 어른들은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만 여겼을까요?
그 나라 국민들껜 송구한 얘기지만, 미얀마, 이라크가 어떤 나라들입니까? 그 취지는 십분 이해하지만 이글은 쓴 필자는 우리나라를 등지고 나눔지수가 높은 그 나라에 가서 사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대개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의 규모 역시 크지 않으며 생활수준도 각 개인 간에 편차가 심하지 않습니다. 즉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그렇고 그런 비슷한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들 간에는 극심한 이해관계의 충돌현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며, 우리가 예전에 이웃집 수저가 몇 벌 있는 것 까지도 안다는 식의 인간사이의 공간이 좁아지는 현상이 일반적입니다.
그런 분위기는 당연히 이웃 간에 사소한 것을 주고받기 용이하지만, 반대로 사람 사이의 정서적 공간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묵은 감정의 폐해도 알게 모르게 쌓이게 됩니다. 나아가 그런 밀집된 감정교류의 채널들은 폐쇄적으로 흐르기 십상이고 내부적으로 따돌림 현상이 심화되며 자신들과 다른 이질적인 사고나 생활방식을 존중하지 않고 핍박하여 도태시키는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합니다.
반면 지구상에서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나눔문화를 보게 되면 외형적으론 무척 무미건조하고 때론 냉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들 사이엔 타인에게 ‘베푼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다만 “나는 네가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너로부터 내가 필요한 것을 취한다.”는 호혜적인 거래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정신은 비단 상거래에서 뿐만 아니라, 소위 ‘기부’라는 행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요소입니다. 서구사회, 특히 미국에서 일상적인 그라지세일(garage sale)도 일종의 나눔문화적 변형이며, 이는 단순히 거래가 아니라 이웃 간의 소통의 장이 되기도 하는 중요한 사회적 순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라지세일을 하면 하루 종일 단 하나의 물건을 팔기도 녹록치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의식 속엔 남이 쓰던 물건은 그 사람의 영혼이 배어있다는 미신적 관념이 마치 DNA처럼 자리잡고 있으므로 자신이 쓰던 물건을 남이 쓰던 물건과 교환하거나 헐값으로 파는 그라지세일이 활성화 될 수 없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나눔’이라 하면 ‘베품’이란 선입견이 나눔의 공간을 선점해 버립니다. 서구의 합리주의가 나눔이란 공정한 거래관계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면, 우리의 나눔은 주는 내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나보다 아래인 자들에게 베풀어 내 ‘꼬마’로 삼는, 시쳇말로 ‘꼬마잡는’ 우월감이 뱃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베품’은 태양이 오뉴월 염천에도 아랑곳없이 내 시혜를 받아들이라 햇빛을 내려쪼이듯, 받는 사람의 입장이나 심정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내가 ‘베풀었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며 그로부터 만족감을 얻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정서적 유전자에서 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태양의 시혜’ 따위는 국가 복지정책을 입안하는 분들의 몫으로 넘기고, 그 도려낸 자리엔 ‘호혜적 거래’라는 새로울 것 없는 신개념을 이식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소위 나눔문화가 일반화되긴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이비 박애주의 일랑 던져버리고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났지만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갈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점을 우선 인식해야 합니다. 나아가 ‘나눔’이란 ‘베품’이 아니라, 나와 상대가 비록 키와 몸집이 다르더라도 동등한 자유인으로써 같은 눈높이에서 ‘호혜적인 거래’를 이뤄가는 것임을 우리의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 가르쳐야하지 않을까요.
물론 ‘호혜적인 거래’가 반드시 물질적 등가성(等價性)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엔 ‘사회참여’나 ‘선행’, 또는 ‘적덕(積德)’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만족감이라는 보상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나눔’속에는 내가 가진 물질을 제공하는 대가로 이런 심리적 만족감을 얻는다는 다분히 공리적(公利的) 계산도 당연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린세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조건적으로 ‘나눔은 좋은 것이다.’라고 세뇌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래에 공짜란 있을 수 없으며 자신이 가진 물질을 타인에게 무상으로 공여하는 사람은 그 대가로 심리적 충만함을 얻는 것인 동시에, 물질을 제공받는 사람도 제공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되 상대적으로 위축되지 않으며, 나아가 다른 기회엔 스스로가 ‘제공자’가 될 수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가르치면 ‘나눔의 문화’는 정착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나눔의 미덕’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베푼다는 것은 타인에게 아무 대가 없이 내가 가진 것을 주는 것’이란 자신들의 무의식에서조차 갈등을 일으키는 위선의 껍데기를 먼저 벗어던진 사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