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체 수선을 좋아하다보니, 대체로 기대하는 수명보다 더 오래 쓰게 되는 편이다. 수선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불의의 사고를 감안하더라도, 오래된 것을 그냥 버리느니 고쳐쓰는 편을 택한다. 사용하다 오래된 것들을 그냥 지나치치 못해서, 꾸준히 닦고 고치고 새롭게 보완하는 일을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물건이 쌓이고 버리지 못하게 된다. 나는 "작동하는 물건들은 최대한 쓰고, 고장났을 때 최대한 수선을 시도한 다음 그래도 안되는 경우 버리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더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물건 하나를 살 때 최대한 오래 쓸 수 있도록 계획을 짜고 구매를 한다. 특히 이런 분야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전자 부품 - 컴퓨터 종류인데, 내 것 뿐만 아니라 가족들을 위해 맞출 때에도 이런 철학이 묻어난다.
요즘은 보기 어렵게 된 LG-IBM의 키보드도 그 중 하나다. 사실 이 키보드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제조년월일을 보면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아직까지 현역으로 쓸만한 키보드이고, PS/2 방식이라는 것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다. 사실 이 키보드는 Q8200 + PC2-6400 + P45 조합으로 사용하고 있는 - 아직도 현역인 - 컴퓨터와 맞물려 있는데, 만으로 10년이 된 컴퓨터라고 하더라도 애초에 잘 맞추었더면 상당히 쌩쌩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형이라는 것이 단지 시간이 오래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은 구형의 방향을 질주하고 있겠지만, 낡고 고루해서 더이상 현재에 적용할 수 없음을 뜻한다면 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사실 구형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최신의 것들이 좋기는 하다. 현재에 있는 모든 가용 자원과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필요에 의해서 발전과 개발이 이루어졌을테니, 이를 지원하지 못하는 오래된 것들은 어쩌면 - 목적에 따라서 -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비단 물품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우리가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맺을 때에도 오래된 관계들은 가끔 지금 우리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한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관심주제나 핵심 역량 같은 것을 10년 전부터 유지한 관계들에서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했거니와 그 때 당시의 관심사와 필요가 지금에도 유효한가 - 에 대해서는 곰곰히 생각해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부분들을 꽉 잡고 있는 (구형의) 관계가 있다. 최신의 세태와 관심사, 필요, 속도를 반영하지는 못하지만 서로 속속들이 알아왔던 것 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삶과 관계가 있다. 같은 컴퓨터를 10년쯤 꾸준히 유지하다보면, 어지간한 증상에는 익숙해져서 왠만한 문제들은 해결이 가능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버틸만하다고 믿음을 가지게 된다. 물건의 예라서 어색한가? 우리가 물건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내가 신뢰하는 물건이 과연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최신의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익숙해졌던 구형의 것일까.
비단 물건 만이 그런가 하면 그렇진 않을 것이다. 물건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의 바로미터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세계의 무수한 삶들 - 구형의 관계들에 대한 시선은 저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