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과의 경기에서 한국이 패했다. 안타깝지만, 경기 자체만 놓고 보면 졸전이었다. 먼저 치러진 독일 대 멕시코의 경기가 축구 감상의 눈높이를 상향시킨 탓일까. 한국뿐만 아니라 무려 이탈리아를 절망시키고 러시아에 온 스웨덴의 경기력도 기대 이하였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는 이케아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해 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진지함이 담겨진 글은 아닐 것이다. 표출할 길 잃은 분노는 황망해하며 두리번거렸을 터이고 그러다 만만한(?) 청원 사이트에 낙착했을 것이다.
국가대항전에서 한국팀이 패하면 나 역시 기분 좋을 게 없다. 한국 국적을 지닌 사람으로서 민족주의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으므로. 그러나 한국팀이 졌다고 진노하진 않는다.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팀의 선전을 나는 개인의 영광으로 치부한다. 따라서 형편없이 깨지고 일찌거니 짐을 싼다고 해서—비록 언짢은 감정이 생길지라도—그것이 한국의 패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공정함의 지반 위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가 승이라면 맘껏 기뻐하면 되고, 아쉽게 패했다면 우리 선수들을 위로하고 상대국 국민을 축하하면 된다. 스포츠에 과몰입하여, 경기 전후로 삼킨 정열과 흥분을 광기와 폭력으로 게워 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스포츠가 존재하는 최우선 이유는 무엇일까. 스포츠를 기반으로 국제적 경기를 벌이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라고—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생각한다. 그래서 스포츠가 폭력으로 변질되는 생득적 흐름이 몹시 불편하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지구적 대회를 개최하는 나라는 이른바 선진국의 반열에 놓인 듯 포장되곤 한다. 아울러 국제 대회를 주최함으로써 떨어지는 과실(돈의 액수)에 대한—뜬구름 잡는 듯한—보도를 흔히 접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부차적이라고 간주되지만, 어쩌면 이러한 정치·경제적 이유들이 국제 경기를 가동시키는 훌륭한 연료인지도 모른다.
"깨끗한 길거리 위해"···러, 월드컵 맞이 '개 사냥' 논란이라는 중앙일보 기사를 보았다. 글의 요지는 러시아가 월드컵 관람을 위해 입국하는 외국인을 의식하여 떠돌이 개들을 ‘청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동물권단체의 주장일 뿐이라고 부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소치 동계올림픽 때에도 불거진 문제였고, 러시아뿐만 아니라 국제 행사를 치렀던—2008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했던 중국 등—여타 국가에서도 있어 온 일이라고 한다. 멀리 갈 것 없다. 한국도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당시 남에게 보이기 싫은 것들을 감추고 없앤 과거가 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치러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매일경제는 평창가는 첫 길목 ‘부끄러운 민낯’이라는 기념비적 기사를 쓴 바 있다.
친구가 집에 놀러 오기 전 집안을 정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마음이긴 하다.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소 주인 없는 개에 관한 합리적 방안을 강구해야지 큰 행사를 앞두고 그들을 도륙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스포츠 관람객의 미적 권리(?)를 해칠 뿐 아니라 개들이 관람객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이유를 대겠지만—대안을 모색해야지—그것으로도 수많은 개를 잡아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반복적으로, 대량의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지구적 행사의 패키지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더구나 가림막으로 낙후지를 가려야 한다는 위 기사의 제언은 얼마나 낙후돼 있는가.
남에게 드러내기에 좋지 않아 보이는 것까지 전시할 수 있는 것도 국가의 용기라고 생각한다. 월드컵은 환경 미화 대회가 아니다. 관람객도, 세상 어느 곳에도 완벽이란 없음을 상기해야 하지 않을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는 어쩌면—피와 곡성이 은폐된—폭력이 휩쓸고 간 흔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