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포털에 '끄적이다'를 검색하면 '끼적이다의 잘못'이라는 결과가 도출됐습니다. 이제 끄적이다도 표준어의 지위를 얻었나 봅니다. 제 기억의 착오일까요(원래 둘 다 표준어?). 비슷한 이야기 하나 더 할게요. '너무'는 '부정적 용언'을 수식하는 부사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좋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요. 언어란 본디 쓰임에 맞게 변화하는 것이죠. 이제 '너무'를 '긍정적 용언'을 수식하는 부사로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어법이 어떻든 우리는 계속 써왔지만요). 저는 구식이라 웬만하면 너무를 '부정 용언'을 꾸미는 데 쓰고, 끄적이다보다는 끼적이다를 사용합니다. 글 제목에 끼적이다를 붙인 걸 설명하려다 실없는 말을 늘어놓았네요. '끼적이다'를 붙이고 쓴 글은 글의 와꾸틀에 매이지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무작정 쓰는 글입니다. 그렇다고 끼적이다를 붙이지 않은 제 글이 기승전결이 뚜렷한 텍스트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당신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 알려 달라. 그렇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알려 달라. 그렇다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하려는 건방진 발언이지만 새빨간 거짓말은 또 아닙니다. 어림짐작할 수는 있으니까요. 말 나온 김에 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저는 설거지를 할 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장갑을 끼지 않습니다. 설거지거리와 제 손의 스킨십에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공중에 퍼지지요. 한번은 이케아에서 사온 와인잔을 씻다가 깨뜨린 일도 있습니다. 강박증이 있는 이처럼 와인잔을 못살게 군 탓이죠. 저도 아름다운 자태를 보이는 그릇·잔을 좋아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릇이나 잔을 고르는 취우선 순위는 부끄럽게도 “보기에 좋았더라”가 아닌 “닦기에 좋았더라”입니다. 문제의 와인잔 주둥이는 제 손을 버거워 했습니다. 이케아에 갔다가 컵에 손을 넣어 보며, "이거 설거지 하기 좋겠는데!" 하고 외쳤다가 경망함을 추스른 적도 있습니다.
세탁기는 참으로 위대한 제품입니다. 세탁기가 없었다면 저는 빨래를 어떻게 했을까요? 이가 없으면 잇몸을 쓰는 게 사람이지만 그래도 끔찍합니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하준 교수의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2010)에는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라는 챕터가 수록돼 있습니다. 너도나도 정보통신혁명으로 인한 변혁에 주목하는 오늘날 제조업의 중요성을 설파하려고 쓴 글일 겁니다. 과장을 섞으면, 세탁기가 없었던 시기와 발명된 시기로 시대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세탁기는 우리 삶을 깡그리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는 빨래 하는 것을 귀찮아하진 않습니다. 버튼만 누르면 든든한 세탁기가 제 소임을 다하니까요. 그런데 건조된 옷가지를 개는 것을 몹시 귀찮아합니다. 지금껏 옷가지를 갠 시간을 죄다 더하면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 옷가지를 갤 시간은 또 어떻고요. 제가 너무 게으른 걸까요.
별안간 듣고 싶은 음악이 떠올랐습니다. 이 음악은 제가 새벽 5-6시 즈음에 듣고 싶은 음악입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냥 제가 이 음악을 그 시간대에 포개고 싶은가봐요. 그런데 지금 자면 새벽 5-6시에 일어나서 이 음악을 듣을 확률은 진심을 다해 말하지만 제로에 한없이 수렴합니다. 그래서 이 노랠 걸고 저는 잠자리에 들어야겠네요. 끼적이고 보니, 전시하기 민망한 글입니다. 팔로워가 소수라는 게 오늘만큼 든든한 적이 없네요. 여전히 바람이 세찹니다. 창문에 와 부닥치네요.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