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일종의 퍼즐 문제를 선사한다. 여기서 독자는 어떻게든 맞추려고 한다. 작가는 너무 어렵게 해도 안 되지만 너무 쉽게 해서도 안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쉽지는 않지만, 자신이 맞추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면서 뭔가 2% 부족하다고 느끼한 뒤에 결말에서 큰 충격을 선사하면서 감탄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는 쉽지 않다.
작가가 독자의 추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먼저 용의자를 엄청나게 많이 설정하는 경우. 대개 용의자들이 섬과 같은 밀실 속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선 10명이 섬에 있었다. 이때는 용의자들 모두의 동선과 알리바이를 파악해야 하기에 그만큼 많은 정보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보통 위의 상황에서는 증언이나 알리바이를 모두 세세히 따져서 반전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독자가 그 많은 사람의 증언 중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하면 반전을 주는데 큰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양의 특급살인을 중간에 몇 번 포기했었다. 너무 많은 용의자와 그 많은 알리바이를 다 기억하지 못하여서 엮고 그렇게 기억해서 보더라도 어떻게든 알리바이를 맞춰서 범인을 추리하고 결말을 맞이하기까지 읽을만한 흥미와 끈기가 떨어졌던 것 같다.
또한 아야츠지 유키토의 '시계관의 살인'과 같은 작품들은 복잡한 밀실의 구조와 많은 용의자에 외부 사람들의 행동과 과거의 사건들까지 기억해야 한다. 웬만큼 충성도가 있는 미스터리 마니아 또는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열광을 하는 작품이지만, 그렇지 않고 이런 장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중간에 이탈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과 수많은 알리바이 속에서 독자가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 채 정보의 홍수 속에 노출된다면 추리를 어렵게 하기도 하지만 결말까지 끌고 가지 못하고 중간에 이탈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반전을 맛보기 위해 겪는 과정이 가혹하다는 말도 이런 점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인물이 상대적으로 적은 경우엔 어느 정도 추리를 하기 쉬워질 수 있다.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사각'에 경우 세 사람의 시점이 오가면서 사건을 진행한다. 그래서 각 시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게 되면 과연 결말을 어떻게 내려고 그러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물론 이 작품의 결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좋았지만,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린다.
한편 '살육에 이르는 병'에 경우엔 선정적이고 잔인한 살해 현장 모습이 상당한 충격을 주고 집중하게 되는 나머지 결말을 추리하는 데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면 사건의 결말과는 큰 관련이 없겠지만, 독자에게 큰 충격을 줌으로써 다른 요인은 상대적으로 덜 집중하게 한다. 이러면 독자는 추리에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미로관의 살인'은 특이하게 액자식 구조로 되어있다. 책 속에서 한 남자가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 받아 그 책을 읽는다는 구조이다. 이런 식의 구조는 책 속 책의 사건만을 추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기에, 책 속 책의 사건만을 추리해 낸다고 작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