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 리뷰]한국영화회고전의 주역, 정일성 촬영감독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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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데일리 씨네21에 쓴 글입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은 정일성 촬영감독입니다. 예능 프로그램 에도 나오신 적 있습니다. 그의 촬영 세계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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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임권택 감독의 1986년작 <길소뜸>을 최근 다시 보고 깜짝 놀랐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이산가족찾기 운동이 열리는 현장을 찾아가 찍은 뒤, 김지미, 신성일 등 배우들이 연기한 극과 합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처럼 제작진이 직접 찍은 영상, 뉴스 클립을 극과 정확하게 합성하는 방식은 시각특수효과 기술이 전무하고, 필름으로 찍은 당시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이 영화에서 정 촬영감독이 보여준 카메라는 한 치의 오차가 없었다.

오래 기다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은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일성 촬영감독은 역시 임권택 감독의 오랜 동지로 기억된다. <신궁>(1979)을 시작으로 <만다라>(1981)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춘향뎐>(2000) <취화선>(2002) <천년학>(2007) 등 무려 18편이나 호흡을 맞췄으니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임권택 감독을 만나기 전에 유현목(<불꽃>(1975) <문>(1978) <사람의 아들>(1981)), 김수용(<가위 바위 보>(1977) <만추>), 김기영(<화녀>(1971) <파계>(1974) <이어도>(1977)), 하길종(<바보들의 행진>(1975)) 등 당대 최고의 감독들이 가장 먼저 찾는 촬영감독이기도 하다. 각기 다른 개성과 세계관을 가진 감독들과 작업하며 매번 다른 스타일을 선보인 그의 이력을 두고, 후배 김우형 촬영감독은 “1980~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한 정광석 촬영감독이 화려한 비행을 하는 폭격기라면 정일성 촬영감독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체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군용 수송기라고 생각한다”고 기자에게 귀띔해준 바 있다. 정확한 비유다. 그의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염두라도 둔 듯 올해 회고전은 <화녀>(1971)부터 <최후의 증인>(감독 이두용, 1980) <사람의 아들> <만다라> <만추> <황진이>(1986, 감독 배창호) <본투킬>(1996, 감독 장현수)까지 7명의 감독과 함께 작업한 대표작 7편을 상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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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녀>)

일단, 김기영 감독의 <화녀>는 그가 과감한 앵글과 색채를 시도한 작품이자 촬영감독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가게 되는 출발점이다. “몇 개월이 걸려도 최고의 컬러를 내달라”는 김기영 감독의 주문에 따라 카메라 테스트부터 세트 제작까지 김기영 감독과 집요하게 컨셉을 찾은 덕분에, <화녀>에서 보여준 그의 촬영은 매우 괴기하고 컬러풀하며 표현적이다. 이야기의 주요 공간인 이층집은 그 흔한 창문이 없어 유독 독특했다. 집안 곳곳에 달린 형광등, 조명을 주요 광원으로 활용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반사된 빛에 상당 부분 의존하다보니 영화 속 시간을 짐작하기 힘들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과 방향을 보고 아침과 오후 그리고 저녁임을 알 수 있는 보통 영화와의 다른 점이다. 식모(나영희)가 동식(전무송)과 정순(김지미), 주인집 부부의 아기를 계단 아래로 던지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앵글과 화면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그로테스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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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증인>)

이두용 감독과 함께 작업한 <최후의 증인>은 이야기도, 빛도 매우 어두운 영화다. 주인공인 오병호 형사(하명중)가 살인사건을 수사하다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마주하는 비극이다. 촬영 전 정일성 촬영감독이 이두용 감독, 배우 하명중과 함께 전국을 돌며 로케이션 헌팅을 했고, 배우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오병호 형사의 동선을 따라 10개월 동안 전국을 누비며 신 순서대로 촬영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패닝, 줌인/아웃 등 카메라의 과감하고 힘 있는 움직임은 거대한 역사와 맞선 개인의 외로움과 초라함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김수용 감독의 1981년작 <만추>(감독 김수용, 1981)는 휴가를 나온 모범수 혜림(김혜자)과 강릉행 기차에서 그녀를 만난 청년 민기(정동환)의 대화신이 많은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인물의 시선을 일치시키거나 자로 잰듯한 리버스 숏을 구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 한대로 대화 상황에 맞는 숏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혜림의 클로즈업숏이 많은데도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과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도 그래서다. 숏과 리버스숏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빠른 제작 진행을 위해 카메라 두 대를 기계적으로 돌리는 요즘의 대화신 촬영과 사뭇 다르다. 기차 밖에서 카메라가 창밖을 바라보는 혜림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다가, 갑자기 패닝해 그녀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을 담아낸 뒤 그대로 터널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은 힘 있다. 그래서 김우형 촬영감독이 김태용 감독과 함께 작업한 <만추>(2010)에서 이 장면에 대한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 카메라가 버스 밖을 향하다가 패닝하면 탕웨이가 버스 좌석에 앉은 채 창밖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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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만다라>는 임권택 감독도, 정일성 촬영감독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는 작업으로 꼽힌다. “<만다라>를 첫 촬영할 때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이라 너무 화가 나고 분노를 표현할 용기가 없어서 수묵화처럼 찍자고 합의했다”는 임권택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는 무척 어둡다. 그가 설계한 빛은 인물과 세상의 일부분만 비추고, 카메라는 현실의 아픔과 고통 때문에 고뇌하는 인간을 화면 주변부에 배치했다. 컬러영화이지만 흑백영화처럼 정서가 매우 황량하고 쓸쓸한 것도 그 때문이다. 큰 수술 뒤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채 퇴원해 카메라를 잡아 열과 성을 다한 그를 위해, 임권택 감독은 <만다라>에서 최초로 ‘촬영감독 정일성’이라는 자막을 헌사했다.
이밖에도 인물의 클로즈업숏과 롱숏이 번갈아 분할된 군중 시퀀스, 인물을 프레임 좌우 수평선에 배치해 부담으로 찍은 숏 등 모더니즘적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촬영은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유현목 감독의 세계에 묘한 변화를 불어넣었다(<사람의 아들>(1980)). 배창호 감독의 1986년작 <황진이>에서 그의 절제된 카메라는 세속의 허물을 벗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황진이에 집중하게 한다. 장현수 감독의 누아르 영화 <본 투 킬>(1990)은 웬만한 젊은 촬영감독보다 힘 있고, 빠르며, 박진감 넘치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선보였다.
이번 회고전에 상영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임권택 감독의 2002년작 <취화선>을 찍을 때 스탭 버스를 타고 가다가 원하는 풍경과 빛을 보면 버스에서 내려 찍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촬영 일정이 빡빡하고 사전에 약속한 장면만 찍는 지금 충무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점에서 이번 회고전은 정일성 촬영감독의 열정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김성훈

*<만추> : https://www.themoviedb.org/movie/471271?language=en-US
*평점 : AAA

*<화녀> : https://www.themoviedb.org/movie/108175?language=en-US
*평점 : AAA

*<최후의 증인> : https://www.themoviedb.org/movie/223610?language=en-US
*평점 : AAA

*<만다라> : https://www.themoviedb.org/movie/255982?language=en-US
*평점 : A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