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정일성 촬영감독 회고전
박홍열 촬영감독이 말하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이어도>와 <비구니>
정제 되지 않은 에너지가 들끓는 이미지들이 많은 영화를 좋아한다. <이어도>(1977, 감독 김기영)는 정일성 촬영감독이 김기영 감독과 함께 작업한 <화녀>(1971), <충녀>(1972)와 달리 불안정한 에너지로 들끓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은 하나의 핵으로 작용한다. 현장에 모니터가 없어 촬영감독만이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이미지를 확인할 수 밖에 없던 시절, 그의 카메라는 자신감이 찬 목소리로 <이어도>를 장악했다. 영화는 산과 바다, 산 등성이와 구릉, 파도치는 절벽과 해안, 흔들리는 배 안과 도시의 빌딩과 도로 사이, 제주도의 바람과 파도, 절벽에 매달려 흔들리는 이름 모를 풀들 사이를,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거침없이 움직이고 공간, 자연과 맞서며 영화 안의 불안정한 에너지를 연결한다.
인물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이 다양하지만 이 영화에선 특히 클로즈업숏이 매력적이다. 정보를 전달하는데 치중하는 최근의 많은 한국영화와 달리 <이어도> 속 클로즈업숏은 감정과 정서를 전달하고 분위기를 형성하며, 이야기의 층위를 더 깊게 만들어내는데 할애한다.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되지 않았나. 가로가 세로보다 더 긴 화면에서 화면 중앙을 벗어난 클로즈업숏은 공간과 인물을 자연스럽게 모으고, 제주도라는 실제 공간과 이어도라는 판타지 공간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처럼 보인다.
빛과 관련해서는 콘트라스트를 과감하게 시도해 인상적이다. 세트 촬영이 아닌 섬이라는 로케이션 촬영으로 진행된 까닭에 조명을 세팅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영화의 빛이 다소 어둡게 표현됐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의 물리적 한계들을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표현하면서 극복한다. 광량이 부족해 보이지 않는 부분들은 과감하게 어둠 속에 놓아둔다. 인물 얼굴의 경우, 빛의 한 부분에 집중해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내어 어둠 속에 빛나는 얼굴을 강하게 표현한다. 주인공이 찾는 진실이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듯 관객 또한 그 어둠을 따라 화면에 담긴, 작지만 강한 빛을 따라가게 한다. 또, 레드, 그린, 블루 등 여러 계통의 색 필터를 조명에 적극 활용한다. 선우현(김정철)이 민자를 만나 그에 얽힌 진실을 알아가는 장면은 푸른색으로, 선우현과 민자(이화시)의 성관계 장면과 과거 천남석(최윤석)과 민자의 성관계 장면은 녹색과 붉은색으로 용감하게 촬영됐다. 서사가 클라이막스로 전개되면서 색은 더욱 과감하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백색광이 아닌 색으로 한 장면 전체를 표현하는 시도는 과거에도 현재도 시도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영화가 실제처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구니>(1984, 감독 임권택) 복원판 얘기를 하겠다. 우연한 기회에 <비구니> 미완성 복원판의 편집을 맡게 됐다. 원래 <비구니>는 전체의 1/5만 촬영된 뒤 중단된 영화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43분 짜리 편집본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당시 촬영된 소스를 최대한 활용해 순서 편집한 버전이다. 원래 촬영 소스를 다 보니 여러 의문점도 들고 현장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재미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비구니>에서 보여준 그의 카메라는 어떤 틀이나 기존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하고, 화면은 정적이지만 프랑스 누벨바그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수몰지역에서 촬영된 전쟁신이다. 피난민들이 긴 행렬을 이뤄폐허를 지나 피난길에 오르고, 이때 비행기가 이들을 향해 폭격하는 신으로, 지금 찍어도 규모가 큰 장면이다. 특이하게도 이 장면은 전쟁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 상황을 넓게 보여주는 롱숏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컷이 많지 않았다. 컷들을 어떻게 이어붙일까 고민하면서 이 롱숏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모든 것들이 숏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피난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고, 그들이 지나가는 곳은 폐허가 되었으며, 폭탄이 연달아 떨어지면서 또 다른 폐허의 흔적을 남겼다. 이 모든 상황이 한 프레임 안에서 다 벌어지면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같은 장면은 촬영감독이 영화에 대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다. 경험과 경륜은 쌓일수록 정체되기 쉽다. 하지만 <비구니>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항상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김성훈
*<이어도> : https://www.themoviedb.org/movie/104310?language=en-US
*평점 : AAA
*<비구니> : DB에 없네요.
*평점 : AAA
*이 글은 부산국제영화제 정일성 촬영감독 회고전 기념 책 '격조의 예술가 파격의 모험가 정일성'에 쓴 글입니다. 김우형 촬영감독을 만나 나눈 대화를 그의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후배 촬영감독이 만난 정일성 촬영감독 글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