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a 배우열전]<버닝> 전과 후의 유아인은 다르다

pepsi81(67)
Published in
#aaa
Words
462
Reading
3 min
Listen
Play
7y

2018_05_16_BurningPremiere_©JuliaBrechler_171831.jpg

“이창동 감독님이 나를 두고 어떤 배우보다도 자의식이 뚜렷한 것 같다더라.” 지난해 겨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 촬영현장에 구경하러 간 적 있다. 극중 벤(스티브 연)의 집을 서래마을에 위치한 고급빌라에서 찍었는데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배우 유아인은 이창동 감독에게서 들은 말을 얘기해주었다. 이창동 감독의 이 말은 솔직하고, 원칙이 분명하며,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그의 면모를 두고 나온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유아인이 이 영화를 작업하는 방식과 관련된 얘기일 텐데, 그때는 영화에서 그가 맡은 종수가 어떤 인물인지, 시나리오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던 까닭에 그가 들려준 말이 수수께끼처럼 들렸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지금, 영화를 보니 앞으로 유아인의 연기가 <버닝> 전과 후로 나뉠 거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보였다.
<버닝>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평범한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이다. 파주 시골 마을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살고 있다. 정식 작가는 아니지만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한다. 그는 배달하러 갔다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해미는 내레이터 모델이다. 종수는 해미에게서 아프리카에 여행 간 동안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남자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종수는 해미와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해미가 자신보다 벤과 더 가까이 지내는 걸 보면서 불편하고, 찜찜하다. 20대 종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의문투성이다. 자신보다 겨우 여섯 혹은 일곱살 많은 벤이 어째서 서래마을의 고급 빌라에 살고, 고급 외제차 포르셰를 몰고 다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 개성 강한 유아인이 지극히 평범한 20대 청년 역할을 맡는 건 아이러니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감독님의) 요구와 (감독님의) 평가가 너무 상충하지 않나. (웃음)” 그럼에도 그가 내린 결론은 “평범함을 정의하고 그것을 표현한 게 아니라 평범함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이다. “오해의 여지를 배제하는 연기. 최대한 단순하고 평범한 표현들. 그렇다고 강박적으로 평범함을 표현하려고 하진 않았고, 내 존재 자체가 표현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종수를 보면 유아인의 얼굴은 온데간데 없다.
이준익(<사도>(2014)의 사도세자), 류승완(<베테랑>(2015)의 재벌 2세 조태오) 등 한국 최고의 감독들과 작업해왔음에도 그는 이창동 감독과의 작업을 오래 전부터 고대해왔다. “이창동 감독의 규칙과 질서 안에 놓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버닝> 현장은 자유로움을 느끼고 초감각을 경험하게 해줬다. “(다른 작품에서 연기를 하다보면) 누가 봐도 가짜 같고 이물감이 드는 환경에서 누가누가 더 뻔뻔하게 연기를 잘하나 겨루는 것 같은 때도 많은데, 이창동 감독님 현장은 철저하게 진짜 같은 순간, 진짜에 가까운 환경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느끼라고 주문한다.”
마술 같은 현장에서 진짜 종수가 된 덕분에 유아인은 난생 처음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유아인은 “극장 밖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이 흥미진진하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버닝>은 본상을 수상하지 못했지만, 칸 공식 데일리지로부터 칸 역대 최고 평점인 3.8점(4점 만점)을 받을만큼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송강호 등 이창동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연기의 한 획을 그었듯이 유아인도 정점을 찍었다. 그런 그의 다음 작품은 1997년 IMF 위기를 일주일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윤정학은 국가의 위기를 일생일대의 기회로 이용하는 금융맨이다. 매 작품 누구보다 성실하게 캐릭터를 준비하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그라면 금융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줄 듯하다.
김성훈

*<버닝> : https://www.themoviedb.org/movie/491584-burning?language=en-US
*평점 : A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