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정일성 촬영감독 회고전
요즘 하고 있는 생각인데 한국영화가 굳이 할리우드 영화와 정면으로 대항할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 우리가 얘기해야 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우리 관객들에게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정일성 촬영감독하면 떠오르는 영화로 <만추>(1982, 감독 김수용)와 <길소뜸>(1986, 감독 임권택)을 선택한 것도 그래서다.
<만추>는 김태용 감독과 <만추>(2011)를 만들기로 하고 공부 삼아 찾아 보았다. 1980, 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한 정광석 촬영감독이 화려한 비행을 하는 폭격기라면 정일성 촬영감독은 묵직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체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군용 수송기라고 생각한다. <만추>에서 보여준 정 촬영감독의 촬영은 카메라 한대로 핵심만 찍어 좋았다. 영화는 살인죄로 복역 중이던 모범수 혜림(김혜자)과 청년 민기(정동환)가 강릉행 열차에서 만나 (상대방이나 열차 밖 풍경을) 바라보거나 대화하는 장면이 많다. 두 대 이상의 카메라로 찍은 리버스숏이 대화신의 어떤 부분에 사용되는지 정확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 원소스가 편집실에 넘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요즘 많은 영화와 달리, 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화면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마주보는지, 어떻게 등을 지는지 등 화면을 명확하고 정교하게 보여준다. 과거 정일성 촬영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액션 장면은 반드시 카메라 한대로 찍어야 한다”고 말씀한 적 있다. 나는 액션신 뿐만 아니라 대화신을 찍을 때도 그 말이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만추>의 대화신은 요즘처럼 인물의 시선을 반드시 일치시키거나 자로 잰듯한 리버스 앵글을 구사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카메라는 누가 대화를 주도하는지, 감정이 어느 쪽에 더 치우치는지 강조한다. 그건 단순히 숏/리버스 숏 구도를 대화 정보만 전달하는 소극적인 카메라와 사뭇 다르다. 그 맥락에서 기차 밖에서 카메라가 창밖을 바라보는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다가, 갑자기 패닝해서 그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을 담아낸 뒤 그대로 터널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숏을 두 개로 분할해도 되는데 위험천만하게 찍었고, 그 힘이 스크린 너머로 전달돼 좋았다. 그래서 그 숏을 그대로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만추>의 버스신에서 시도했다. 카메라가 버스 밖을 향해있다가 패닝하면 탕웨이가 버스에 앉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여러 이유 때문에 스튜디오와 야외에서 각각 촬영해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할 수밖에 없었다. 두 소스를 정확히 합성하기 위해 스튜디오에서 패닝하는 시간을 잰 뒤 야외 소스를 찍을 때 시간을 똑같이 맞췄다. 사람들은 뭣하러 고생스러운 숏을 찍냐고 생각했겠지만, 김수용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함께 찍은 그 숏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름 오마주를 바쳤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은 제작 당시 기술적으로 큰 도전이었던 것 같다. 영화에는 이산가족찾기 풍경을 찍은 뉴스클립과 영상 자료가 꽤 많이 등장하지 않나. VFX(시각특수효과)가 전무했던 그때, 메인 소스로 이산가족찾기 뉴스 클립을 설정한 뒤 허구를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결합시키기 위해 촬영 전부터 정교한 촬영 설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뉴스 클립 같은 원소스를 틀어놓고, 배우들이 그 앞에서 실제처럼 연기하는 방식으로 촬영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기술적인 한계도 없지 않지만, 당시로서 그 같은 시도 자체가 대단하고 의미있다.
기술적인 도전만큼이나 이 영화에서 정 촬영감독이 보여준 촬영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고민이 많이 담겼다. 특히, 주인공 화영(김지미)이 전쟁에서 헤어진 아들 석철(한지일)이 정말 자신의 아들인지 확신을 하지 못한 채 차를 몰고 떠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동차가 달리다가 갑자기 선 뒤 다시 달리지 않나. 카메라가 화영이 브레이크를 밟는 모습이나 표정을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화영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만약에 그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가 자동차 내부에 세팅돼 화영이 브레이크를 밟거나 뒤늦게 찾은 아들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얼굴을 찍었더라면 편집실에서 그 숏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 촬영감독이 찍은 그 장면은 간단하면서도 인물의 온갖 감정을 고급스럽게, 또 영화적으로 담아낸 촬영의 결과이다.
김성훈
*<만추> : https://www.themoviedb.org/movie/471271?language=en-US
*평점 : AAA
*<길소뜸> : https://www.themoviedb.org/movie/263381-gilsoddeum?language=en-US
*평점 : AAA
* 이 글은 부산국제영화제 정일성 촬영감독 회고전 기념 책 '격조의 예술가 파격의 모험가 정일성'에 쓴 글입니다. 김우형 촬영감독을 만나 나눈 대화를 그의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후배 촬영감독이 만난 정일성 촬영감독 글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