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에는 ‘길들인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만년필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 표현을 중학생 시절 처음 만년필을 선물 받았을 때 들었는데,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오랜 시간 써서 나에게 꼭 맞는 형태로 만드는 것.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만들어나가는 것.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맞춰나가는 상대로서의 필기구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가 도구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실은 내가 도구에 길들여지기도 한다.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 오래된 편한 친구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내 본모습이 나오듯이, 오래 쓴 만년필을 잡으면 중고등학생 시절의 내 반가운 글씨들이 튀어나온다. 오랜만에 만나도 늘 반갑고 좋은 기억만 남기는 사람들이 있듯, 만년필은 내게 그런 존재다.
김규림, 《아무튼, 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