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는 특별했다. 단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신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11살 아이답지 않은 여유로운 표정에 말투도 또래들처럼 급하지 않고 조곤조곤했다.
나는 그 애가 어른스럽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정말 어른 같다는 건 아니고 5, 6학년 언니들처럼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그 애를 좋아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반 애들 모두가 그 애를 좋아했다. 다들 그 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고,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 애는 이름도 평범하지 않았다. 전교에 같은 이름이 여러 명이었던 나와는 달랐다. 게다가 그 애는 외동이기도 했다. 그 시절에 외동은 흔치 않았다. 그 애는 심지어 도시락까지도 남다른 걸 가지고 다녔다. 토끼가 그려진 앙증맞은 플라스틱 도시락이 아니라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일제 보온 도시락이었다.
똑같은 콩자반이라도 그 도시락에 담겨 있으면 특별하게 보였다. 마치 똑같이 촌스러운 파란색 학교 체육복인데 그 애가 입고 있으면 세련되어 보이는 것처럼.
쉬는 시간마다 그 애의 주변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렸다. 우리 반 애들에다 다른 반에서 온 애들까지 있어서 항상 북적거렸다. 그 애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주로 듣는 쪽이었다. 딱히 신나게 맞장구쳐주지도 않고, 약간 웃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 애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도 그 애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제 본 만화 이야기, 동생과 논 이야기를 하며 그 애의 반응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소심하고 말주변이 없었다. 그냥 내 자리에 앉아서 그 애와 그 애를 둘러싼 무리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마음속으로 그 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그 시절 나는 책을 무척 열심히 읽었다. 집에는 어머니가 사준 어린이용 세계 명작 전집이 있었다. 100권 가까이 되는 그 책들을 나는 전부 두 번 이상 읽었지만, 동생은 손도 대지 않았다.
동생은 책보다는 친구들과 흙장난하는 걸 훨씬 좋아했다. 당시 화려한 두꺼비집 만들기가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통에 조그만 삽까지 써서 마치 해수욕장에서 모래성 쌓기 대회를 하듯 두꺼비집을 만들었다.
매일 학교 모래밭에서 두꺼비집을 만들고 와서 흙투성이가 된 동생을 어머니는 못마땅해했다. 언니 좀 본받아서 책을 읽으라고 동생을 나무랐다. 그래도 동생은 친구들과 노느라 책에 끝까지 흥미를 못 붙였다.
사실 나도 같이 놀 친구가 있었다면 책을 안 읽었을 것이다. 나는 친구가 없었다. 그렇다고 동생과 동생 친구들 사이에 끼여서 놀기는 창피했다. 겨우 두 살 차이라지만 걔들은 저학년이고 나는 이제 고학년이니까.
보통 내 나이엔 흙장난을 졸업하고 살구놀이(공기놀이)나 고무줄 뛰기를 했다. 공교롭게도 두 놀이 다 혼자서 하면 재미가 없었다. 전봇대와 나무 사이에 고무줄을 묶어놓고 혼자 팔짝 팔짝 뛰어넘다 보면 문득 찬바람이 불면서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에 느끼는 기분은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쓸쓸하다.
처음엔 다른 아이들과 놀고 싶어 동네에서 애들이 고무줄 할 때마다 근처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 어떤 팀도 나를 깍두기(우리 동네에선 애들을 두 팀으로 나눌 때 숫자가 안 맞으면 제일 못하는 애를 덤으로 아무 팀에나 넣었다)로조차 데려가지 않았다.
아무리 근처를 얼쩡거려봤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안 보이니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집에서 동생이 오길 기다리며 혼자 심심해하다가 자연히 책을 읽게 됐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내가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며 놀았다. 오즈의 마법사에서는 내가 도로시가 되어 나쁜 마녀를 물리쳤다. 앨리스가 되어 웃는 고양이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소공녀만큼은 내가 주인공인 세라가 될 수 없었다. 세라는 당연히 그 애였다. 늘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모든 아이들이 그 애를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어 했으니까. 그럼 나는 누굴까, 하녀 베키일까? 세라가 베키에게 손을 내밀듯, 나에게도 그 애가 손을 내밀어주는 날이 올까?
나는 그런 날은 절대로 안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 애도 다른 아이들처럼 나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애 주변에 있는 여러 아이들 틈으로 끼어들어가 말을 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계속 마음속으로만 그 애에게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어떤 집을 방문하게 됐다. 꽤 큰 단독주택이었는데, 마당엔 조그만 연못도 있었다. 색색의 돌과 귀여운 개구리 조각상, 살아 있는 빨갛고 노란 금붕어가 참 예뻤다.
집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우리를 반기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집안은 더 멋졌다. 나뭇결이 살아 있는 벽에다 금테 둘린 액자도 많이 걸려 있고 뭔가 우리 집보다 좋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주눅이 든 채로 어머니 옆에 바짝 붙어있는데 방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 애였다.
아주머니는 나와 그 애가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보고 그 애랑 같이 놀면서 어머니를 기다리라고 했다.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안방에서 이야기를 하고(지금 생각해보니 아주머니는 보험 회사에 다니셨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애의 방 침대에 나란히 걸터 앉았다. 나는 그 애와 단 둘이서 있을 수 있는 이 행운이 믿기지 않았고 겁도 좀 났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그 애와 친해지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히 그 애가 먼저 말을 걸어줬다. 20년도 더 지난 옛날이라 그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어른들의 상담이 길어진 덕분에 두 시간 넘게 그 애와 계속 이야기했다. 나중에는 같이 살구놀이도 했던 것 같다.
볼일을 끝낸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겨우 하루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벌써 그 애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된 것처럼 행복했다. 나는 내일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빨리 학교에 가서 그 애와 아는 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날 학교에서 그 애는 나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어쩐지 나도 그 애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애에게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그냥 평소처럼 쳐다만 봤다.
하교길에도 그 애는 여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 애와 집 방향이 같았기에 멀찍이서 그 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분이 복잡했다. 어제 그 애와 이야기하며 놀았던 건 없었던 일이 된 것 같았다. 내 상상 속 이야기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집에 갔더니 어제 봤던 아주머니가 와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 주려고 사왔다며 과자 세트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혹시 그 애도 집에 갔냐고, 심심하면 가서 같이 놀라고 했다.
나는 그 애가 학교에서처럼 나를 모른 척할까봐 불안했다. 하지만 또 그 애와 둘이서만 놀고 싶어서 과자 세트에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과자를 꺼내 그 애의 집으로 갔다. 그애는 나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 반가워했다. 우리는 또 재밌게 대화를 했고, 아마 살구놀이도 했을 거고, 문방구에서 산 종이 인형도 같이 오렸을 것이다.
그 다음 날에도 그 애는 언제 나와 놀았냐는 듯이 나를 모른 척했다. 나는 멍청한 편이라 똑같은 일을 두 번 겪어봤자 소용이 없다. 세 번을 채워야만 비로소 깨닫는다. 그래서 그런 일이 세 번 반복된 뒤에야 그 애는 학교에서 절대로 나와 아는 척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뜻밖에 별로 슬프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애의 비밀 친구가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서로를 데면데면하게 대하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남들 모르게 둘이서만 놀고, 전화 통화도 하고, 심지어 대중 목욕탕도 같이 가는 그런 비밀 친구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서 그 애 주변에 모인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됐다. 거기 있는 애들 중 그 누구도 나처럼 그 애와 특별한 친구가 될 순 없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들었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자랑하고 싶기도 했지만, 꾹 참았다. 내가 그 애와 비밀 친구라는 걸 말해버리면 더 이상 '비밀' 친구가 아니게 되니까. 그 애의 특별한 친구에서 그냥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그 애에게 특별하게 느껴지고 싶었다.
그 날은 아마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종례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데 왜인지 그 애가 복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애와 같이 있는 아이들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아이들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면 뒤에서 조용히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 애는 나를 보더니 그제야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 애와 있던 아이들도 우르르 내려갔다. 나는 꾸물거리면서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문득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가 나를 돌아본 것이다.
나는 별생각없이 그 애의 시선을 흘려보냈다. 나중에 그 애의 집에 가서 뭘 하고 놀지만 생각했다. 그래서 또 바보같이 그 애가 나를 세 번째로 돌아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애는 일부러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걷고 있었다. 내가 너무 뒤쳐지지 않게, 지나가는 사람이 얼핏 보면 나도 그 애 무리에 속한 아이처럼 보이게.
그 사실을 깨닫자 기쁨이 벅차올라서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조금 빨리 해서 자연스럽게 그 애 무리에 합류했다. 다들 내가 온 걸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학교에서처럼 나에게 아예 관심이 없고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바빴다.
나는 혼자 걸을 때처럼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옆에서 듣기만 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이 아이들과도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친구가 생긴 건(실제로 생기진 않았지만) 처음이었다. 심장이 막 뛰다 못해 얼굴이 다 뜨끈뜨끈해졌다.
아이들은 수영장에 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수영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널찍한 계곡에서 튜브를 타고 둥둥 떠다녔던 경험은 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나도 수영을 해봤다고, 계곡에서 튜브를 탔다고.
하지만 누구도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수영장에 비해 계곡은 너무 시시한가? 나는 좀 무안해졌다. 하지만 이번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애와 친해졌듯이 이 아이들과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해수욕장에 가봤다고 말했다. 파도를 타면서 놀았더니 밤새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무시당했다. 아무래도 수영장 이야기가 아니면 말을 꺼내선 안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우리 동네가 가까워졌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이 많은 아이들과 하교할 기회가 올지 모른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쥐어짜낸 끝에 수영장은 아니지만 비슷한 곳에서 수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도 불과 며칠 전이었다. 나는 더 늦기전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생각에 기쁜 나머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수영장은 못 가봤지만 대중 목욕탕에 갈 때마다 수영을 한다고. 정말 재밌다고.
아이들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그 애도 눈을 크게 떴다.
한 3초쯤 정적이 지나간 뒤 한 아이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무슨 목욕탕에서 수영을 하냐고, 그게 말이 되냐고 짜증을 냈다. 다른 아이도 그 말을 거들었다. 또 다른 아이도 말도 안 된다고 하더니 갑자기 웃었다. 그러자 전염이 된 것처럼 아이들이 막 웃어댔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애를 쳐다보았다. 그 애만 유일하게 웃고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며칠 전에 그 애랑 나랑 같이 대중 목욕탕의 길쭉한 냉탕에서 첨벙거리며 수영하고 놀았으니까.
나는 그 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 애는 입을 열 듯 말 듯하더니 대뜸 웃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입을 열어서 진짜 말도 안 된다고 한마디 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다같이 나를 비웃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내가 말없이 우리 집 골목으로 빠지자 아이들은 웃음을 그치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멀어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 애를 생각했다. 그 애의 웃던 얼굴을, 말도 안 된다고 말할 때의 그 즐거워하던 목소리를.
그후로는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아마 나는 저 일이 있은 뒤에도 그 애와 계속 놀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정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해서 전학을 갔기 때문이다. 몇 번 전화 통화를 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나는 그 애에 대한 추억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내가 이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applepost님의 나는 뭣도 모르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kimthewriter님의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소녀 #1 글 덕분이다.
나는 좋아하는 책을 수십 번 읽는 버릇이 있다. 마음에 든 글도 여러 번 읽는다. 두 분의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에 반복해서 읽다 보니 신기하게도 아주 잊은 줄 알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다른 분의 글에 자극을 받아 추억을 끄집어내게 된 것 또한 스팀잇 덕분에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비록 우중충한 추억담이지만, 쓰는 동안엔 무척 즐거웠기에 두 분께 크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