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와 문화에 있어서 역시 가장 첫번째로 다루어야 할 것은 뭐니 뭐니해도 높았던 식자율. 즉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비율인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현대에 이르어서까지 농촌이나 어촌의 유서 깊은 집안을 방문해 보면 반드시 고문서와 여러 오래된 서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중 재미있는 점은 [농업전서]같이 농업과 농법에 대해 전하는 책도 있고 여성의 교양을 위한 책도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미지 출저:http://www.city.hino.lg.jp/index.cfm/202,152695,394,html
즉, 우리나라와 중국. 심지어 서방의 사회와 비교해서도 경시수 없을 정도로 농민과 여성의 식자율과 교육수준이 낮지 않았습니다.
1874~1875년경 즈음 일본에 머물던 러시아인이 쓴 [메이지 유신 회상]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요코하마에서 인력거꾼, 마부, 찻집 아가씨들이 틈만 나면 품속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읽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고, 라틴계 나라들이나 러시아와 비교하면 일본인의 식자율이 훨씬 높다고 했다고 하는 군요.
그러면, 왜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한국에 비해 앞도적으로 식자율이 높았던 걸까요?
일본어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문자. 히라가나와 카타카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현재 남아 있는 문서로 본다면, 처음 히나가나와 카타카나를 한자와 혼용해 쓰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세기경부터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략 13세기 후반부터는 문서 전체의 20퍼센트 정도가 이 히라가나, 카타카나가 차지하다가 15세기가 되자 비율이 갑자기 늘어나 60~70퍼센트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용문서는 대개 히라가나가 차지했고, 카타카나는 1~2퍼센트 정도밖에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문자의 보급은 히라가나가 보급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던 모양입니다.
*카타카나가 적혀있는 일본의 고문서
*또 다른 고문서. 글의 상당수가 히라가나로 적혀있다.
그렇다면 히라가나는 어떤 문자였을까요?
히라가나의 탄생과 확산을 주도했던 것은 주로 여성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여성과 농민들을 교육에서 배제하고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여러 아시아의 사회와는 대조됩니다.
물론 일본도 남성에 비해선 식자율과 교육수준은 확실히 상대적으로 낮았겠지만 결코 무시할수 없는 수준으로 문자가 보급되었다는 것이고, 이 문자의 보급율은 자연스럽게 교육과 일반시민들의 지성과도 연관이 있었겠지요.
일단 어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예나 지금이나 독서율은 높았던 모양이니까요.
히라가나의 본래 이름이 '온나모지'(女文字)라는 것을 아세요? 그 이후에는 '온나부미'(女文)이라고도 불렸었는데, 고문서를 살펴보면 여성이 쓰는 편지글은 기본적으로 히라가나였고 남성이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도 일단 히라가나가 주가 되었다는 데요, 이런 높은 여성의 식자율 덕분인지 일본은 옛날부터 여성문학의 창작이 활발하게 안착되고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책읽는 중세의 일본 여성
*옛 일본의 그림책
어쩌면, 근.현대의 일본시민들의 높은 독서율과 문학수준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도 고려시대까지는 일반백성들과 여성들도 글을 알고,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여기더라...라는 기록이 중국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조선시대에 이르어 이 식자율이 급하락 합니다.
....도대체 조선시대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더구나 그 시대엔 발달했던 상업을 저해하고 농업일색의 국가로 바꿔놓은 대다가, 문치주의로 지나치게 치우쳐져있던 시대였으니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은 그 제 1책임이 바로 일본이 아닌 조선. 그것도 기득권층에 주로 있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여담이긴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계기도 참 황당했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조성을 살피기 위하여 부하 유즈야 야스히로(柚谷康廣)를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그가 잔치에서 일부러 술에 취한 척 주머니를 끌러 바닥에 후추를 잔뜩 흩뿌렸습니다. 대항해시대때 후추 한상자는 노비 3명의 가격보다 더 비쌌고, 한줌의 후추만 있어도 조선에서는 집과 땅을 살 수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어마어마하게 비싼 향신료였던 후추.....
그런 후추를 그가 조정대신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흩뿌리자 순간 악사들도, 기생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후추를 향해 달려들어 난장판이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유즈야 야스히로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너희 나라는 이제 끝장이다!나라의 질서와 사람들의 태도가 이렇게 엉망이니 어찌 망하지 않겠느냐!"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지죠.
풉 웃기네요. ㅎㅎ
언제나 백성들의 기강과 정신은 국력의 제일 요소인 모양입니다. ㅎㅎ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히라가나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문자로 사용되다가 그것을 남성이 받아들이는 형태로 점차 사회에 보급되었다는 군요. 남성들의 세계였던 공적인 곳에서는 한자가 주로 쓰였고 주술적인 일이나 절, 법정등에서는 카타카나가 혼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히라가나를 썼던 것은 사적인 편지에서 주로 썼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점차 이 히라가나가 공적인 경우에서까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여성문학의 창작이 활발했던 14~15세기 였고 이 시기가 일본 사회의 문자 보급에 굉장히 중요했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시간이 점차 지나자 하급무사들까지 히라가나 혼용 문서를 쓸 수 있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죠.
심지어 양도증서까지 히라가나로 쓰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재산양도가 당사사들간의 관계와 합의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았고, 현대처럼 공적 기관이 등기로 인지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양도행위에 증서가 필요했다는 것은 당사자 주변의 일정범위의 사회가 인지해주는 것을 필요로 했다는 뜻이며 그 범위내 사람들이 증서를 읽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안되었기 때문에 히라가나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중세의 문서는 공적 문서가 편지의 형식을 띠기 시작하면서 (날짜와 발신인.그리고 하단에 수신인의 이름을 넣는 형식) 자연스럽게 점점 공적 문서에도 히라가나를 혼용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볼때 일본의 국가체제는 서민사이의 문자 보급을 전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독특하군요.
제 2부에서 계속...
2부에서는 일본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달했던 화폐와 금융의 방식과 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