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회는 변화해왔다. 서양에서 근대가 시작됐던 이유도 기술의 발달로 인한 산업화에 의해서였며 자본주의도 태동의 원인이 됐었다. 기술 발달에 따른 사회 변화와 복제 시대의 예술로의 접근은 발터 벤야민에 의해서였다. 그는 인간이 기술을 사용하면서 단순히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닌, 기술 발달로 인한 미메시스, 복제된 예술이 확대되는 조화로운 사회를 꿈꿨다. 기술 발달에 따른 시대를 자연상태인 1단계 부터 21세기 네트워크 체계의 3단계까지 나눠봤다. 그리고 네트워크 체계 이후 도래할 제4기술은 무엇일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고자 한다.
기술복제 시대의 단계
제1기술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목적의 기술이다. 근대 이전에 인간은 자연을 단순히 마법적 주술의 형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근대의 계몽주의는 자연은 단순히 인간의 진보를 위한 부속물로 취급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이 세계 및 모든 상황의 중심이며 궁극의 목적이라고 보는 인간 중심 주의였고 기술의 발전은 자원을 확보하여 산업화를 이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진보는 자연을 개척하는 것, 역사적 유물론, 급속한 산업화를 통한 제국주의는 근대의 커다란 리바이어던이자 한계 지점이었다.
제2기술은 발터 벤야민이 저서 <기술 복제 시대 예술>에서 언급했다. 과학 기술의 사회화를 통해서 여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마법적 주술, 신화의 제1기술의 해체를 통해서 신체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 예술은 일상생활과 노동과정 모두에서 소외된 개인들이 상실해 버린 능력을 회복하는 장을 제공하고자 했다. 근대의 산업화를 넘어서 탈근대, 복제 시대의 예술,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했던 것이다. 제2기술의 시대는 신문, 책, 텔레비전, 영화, 사진, 라디오 등의 대량 생산의 포디즘으로 인해 대중 문화가 탄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공간 영역이 확장하여 의식의 지적 활동까지 확장하여 학문이 과학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1기술과 제2기술은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응집된 모순 속에 양차 세계 대전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매개체였다.
제3기술은 현재의 네트워크 시대이다. 여러 노드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거대한 망을 이루는 인터넷의 탄생은 IT 기술의 발달로 산업 혁명 이후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기존의 구조들을 탈피한 탈구조, 가상현실의 시대를 열었다. 네트워크는 미분화한 개개의 지점들이 파편으로 구성되어 전체를 탈구축 한다. 네트워크 공간은 현실을 뛰어 넘는 실재의 이미지들과 이러한 이미지들의 현실인 가상의 두 가지 세계가 공존한다.
이공간(아공간)의 형성
제3기술은 제1기술, 제2기술을 탈구조화시키고 탈구축하지만, 오히려 이미지화된 예술품의 기술 복제로 현실에서 이공간(아공간)을 만든다. 제3기술의 시대에서는 제2 복제 기술시대의 산물인 사진, 영화, 음반산업을 송두리째 옛 것으로 떠밀어낸다. 디지털사진기의 대두로 인한 필름 카메라의 종말, 디지털 기술로 인한 영화의 복사, mp3 음원으로 변환으로 인한 음반 시장의 축소가 예이다. 이렇게 제2 복제 기술시대의 산물들이 옛 것으로 밀려나는 원인은 자본에 의한 이윤창출의 실패와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의 시점에서 도태이다. 가장 큰 원인은 디지털 컨텐츠의 보관으로 모든 질료들을 축소화하여 네트워크 저장 공간에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 공간에서 디지털 정보의 범람은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은 과다 인자로 인하여 예술적, 미학적 아우라 자체는 첨예하게 줄어든다. 오히려 예술 작품에 있어서 오리지널 진품들의 가치는 상승한다. 이는 가상 공간으로 저장된 실물과 이를 미메시스화한 대량의 복제물 보다는 가치 있는 진본 예술로의 회귀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아공간은 오리지널 예술품의 아우라를 더욱 확장시킨다. 그러나 이는 전시와 상영이라는 공간에 한해서이지 창조자하는 예술가들의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보편적 예술 전시 공간은 개인의 네트워크 정보 공간으로 수축시켜 아공간을 확장한다.
The Conjurer, by Hieronymus Bosch, 1501
이렇게 예술작품을 수축된 아공간으로 몰아 넣음으로써 각종 기술 기계들의 시선과 응시의 불일치가 발생한다. 아공간은 네트워크 상에서 불특정 하게 등장한다. 아공간에서 예술은 기술시대를 건너뛰며 전시, 영화, 음악의 오리지널은 현실 공간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둔다. 제3기술이 무한 복제를 하면서 세계의 일관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새로운 공간으로 예술을 밀어넣으며 확장시킨다. 그러나 제3기술의 문제는 시선과 응시의 불일치로 응시 기계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 응시기계는 끊임 없이 네트워크 상에서 움직인다. 이전의 시대에 개인이 직접 예술 공간을 찾아 나서야 했다. 개인의 욕망은 사회(대타자)와 부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네트워크 시대는 각종 모바일 기기로들이 노드화되어 인위적으로 창출 없이도 끊임 없이 복제된 가상 세계를 구성 가능하게 했다. 이로 인해 주체는 스스로 응시 기계와 일체화되고, 응시 기계에 사로잡힌다. 스마트폰, 모바일기기, 무선네트워크, 온라인게임 등에서 주체는 응시 기계에 포섭되는, 스스로 응시 기계가 되려 하는 히스테리 신경증자이다. 제 4기술, 앞으로 도래할 가까운 미래의 기술 시대의 인간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상상한다, 주체는 응시기계를 스스로의 몸에 이식하여 가상의 동일자와 일치될지 모른다.
응시기계, 시선과 응시의 불일치
응시기계는 라캉의 ‘응시’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중독 현상이다. 현대인은 욕망의 분출물을 위한 도구의 대상이 필요하다. 응시기계는 어떠한 대상화된 물질이나 인격으로도 투사를 위한 끊임없는 자기 이미지의 복제를 위한 추상적 사물들(거울 단계, 깨뜨려진 거울, 왜곡된 거울, 죽음을 비추는 거울)이 기술적으로 구현된 기계이다.
어떠한 기계 속의 가상화된 사물을 주체가 바라볼 때 시선과 응시가 불일치되는 것을 응시기계라 칭한다. 이 때 시선과 응시가 불일치 하면서 주체는 역전이 되는 응시기계(대상a)를 욕망한다. 시선을 현상학적 개념으로 세계의 사물에 대한 지각의 현존이라면 응시는 역전이된 상으로 인해 원형에서 사각 피사체로 변형되어 왜곡되어 나타난다.
제3기술 시대에서 응시 기계들은 게임기,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이메일, SNS의 디지털 기기 외에도 왕따, 자녀교육, 폭력, 정치 등의 현상이 있다. 주체의 지각은 원형의 시선이나 이미지화된 가상화된 사물(시뮬라시옹)은 사각의 대상물이다. 주체는 이러한 사각의 대상물을 바라보며 인식한다. 이렇게 원형의 매개체를 통하여 피사체가 사각으상이 맺히는 것을 응시라하고, 주체는 이를 바라볼 때 인식의 부조화가 발생한다. 원형 렌즈를 사용하는 카메라, TV, 모니터, 스마트폰, 집의 형태, 영화 스크린, 세계의 보편적 사각형이 바로 응시의 왜곡을 일으키는 대상물의 매개체들이다. 제2복제 기술시대에서 기술이 발달할수록 응시 기계는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상품 대량 생산으로 응시기계는 개인과 더욱 밀착되어 형태상 상품에서 개인으로, 접근상 개인의 소외에서부터 사회 네트워크로 접속한다.
네트워크 체계에서 응시기계는 현실과 가상 공간 모든 곳에 존재한다. 주체는 응시시계를 행위의 잔여물로 구축하여 자본주의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끊임없이 자기를 확인하려는 중독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중독 현상들(비리, 욕정, 뇌물, 청탁)의 자본주의의 이기심은 응시기계의 무의식의 잔여물이다. 중독 현상으로 인한 죽음으로의 귀환을 표상하는 응시 기계는 주체의 의식이 배제된 현대인들의 무의식을 가장한 생활 양식에 기생하고 있다.
응시기계를 극복하려는 주체는 원자화 되어 타자와의 소통은 결국 실패하고 강박증자가 된다. 매 순간마다 응시기계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하고,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강박증에 빠지는, 현실의 타자는 사라지고 이미지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에 부합하는 ‘응시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자기에게 말을 거는 강박증자가 되는 것이다. 강박증자에게 타자는 보이지 않는다. 주체와 관계를 맺은 타자는 이를 깨닫지만 응시된 주체의 시선에 붙들려 관계에서 소외가 된다. 주체의 거짓된, 의도된 자기 현시의 나르시즘은 응시기계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 욕망을 충족시키기만 응시기계의 시선에 재응시 되어버린다.
우리가 응시기계에서 벗어나는 법은
첫째, 의식을 밖으로 내놓는다. 이는 주체가 끊임 없이 자기 사유하는 것이다. 주체의 의식화는 거울 단계의 대상을 생성시킨다.(자기위주의 언사로 의식을 밖으로 내놓고 내면에서는 생각을 한다-의식의 나감. 응시기계는 주체가 고립되어 있을 때 대상a가 되어 의식을 대상과 결합시키고 사고를 마비시킨다-의식의 들어감)
둘째, 문자기계로 소외를 벗어나는 법이 있다. 주체는 스스로 문자기계가 된다. 사유 하는 것으로 인한 의식의 나감과는 반대로 남아있는 잔여물(무의식)로 채운다. 이는 곧 언어의 언표 행위이다.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이다. 무의식을 문자 기호로 표현함으로써 의식을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한다. 즉 이는 주체가 끊임 없이 기호를 생성시키는 문자기계이다. 끊임 없이 작동하는 문자기계의 에너지로 생각은 정지하고, 무의식의 에너지 소실로 주체의 의식이 들어온다. 관계에 있어 문자기계는 ‘표현하지 않는 것들의 표현’이다. 무의식은 표현함으로 욕망의 변증화를 언어의 흐름으로 들어가게, 나오게 하여 주체와 타자간의 욕망의 균형을 이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