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무엇인가? 바로 사회의 반영이며 미래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의 문화는 자본을 위한, 단지 즐거움을 생산하는 껍데기이다. 영화, 음악, 연극, 뮤지컬, 책 일련의 문화 활동은 자본에 종속되는 중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인 크로포트킨은 공동체적 자유를 논하면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사회 생활의 최상의 목표가 만인에게 빵을 주는 것이고 다음은 여가, 즉 문화 생활을 즐기도록 해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만인에게 빵을 주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경제적 평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노동의 대가는 행해진 성과 위에 욕구를 놓고,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권을 최우선으로 인정하고, 그 다음에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노동이 중심이 되는 근대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문화가 행복의 척도를 결정한다.
"떡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경험을 해 본 사람이 익숙하게 잘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스개 소리지만 문화도 그렇다. 문화를 접한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문화의 다양성이 일방적 교육에 가로 막혀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절실한 표현이다.
쉽게 문화라는 건 한 사회의 생활 양식이다. 반면 어렵게 접근하여 문화는 특별하다는 인식론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원인은 입시 위주의 천 편 일률적인 교육에서 비롯된다. 이럴 때부터 쉽게 문화적 경험을 접할 기회는 차단된다. 어떤 것이 문화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미디어 위주의 단순한 컨텐츠가 대중 문화 인양 인식된다. 결국 떡을 한번도 보지도 못하고 먹을 기회도 박탈당한다. 그리고 떡을 먹어도 맛있는 떡인지 모른다.
이러한 경향은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양과 지식 체계도 적용된다. 비상식적 교육이 개인의 상식적 문화 관념과 가치관을 거세해 버린다. 반면, 일부는 어떠한 계기로 문화의 다양성을 깨닫고 사회적 소양과 가치관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스스로 문화적 소양과 지식 체계를 만들어간다. 그렇지만 이들은 소수이다. 소수는 철저히 외면 당하는 현실에서 이들은 이방인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즐기는 집단으로 분류되지만 대중 문화의 유리현상으로 인해 소통은 부재하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에서 김구는 “대한민국이 동아시아 산업화의 주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 선진국의 척도는 모든 구성원들이 문화를 즐기고 받아들이는 환경이 조성될 때 가능할 것이다.” 라며 대한 민국이 문화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또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라며 높은 문화가 힘이 행복을 가져다 주고 인류의 보편적 행복에 기여한다고 미래의 세대에 당부하고 있다. 김구의 소원대로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문화의 범위는 광범위하다. 모든 분야의 어미에 '문화'를 붙이면 곧 문화가 된다. 음악 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음악은 사회적이다. 음악과 사회 사이의 새로운 연계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강연을 엮은 책 <음악은 사회적이다>에서 사이드는 “음악은 먼 곳으로 이동하고, 경계를 침범하며 한 사회 안에서도 여러 장소를 넘나드는 능력이 있다. 완성된 음악가에게 음악은 독자적인 지위와 장소를 갖는다.” 오늘날 음악가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작곡과 연주, 해석,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특히 음악을 명백히 관념적인 특유의 영역으로 이행시킨다. 또한 음악가는 어느 정도 격리시키는 일종의 전문 분화주의를 통해 사회를 유지한다. 음악이 사회에 수사적으로 사회적이며 유연한 전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음악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실천되면서 동시에 개개인의 연주와 수공, 생산을 전제로 한 예술이다.
음악과 관련된 정보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글로벌 멀티미디어 시대에 ‘음악전문가’의 지위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특정 시공간으로 시야를 좁혀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이드의 지적대로 오직 아마추어만이, 다시 말해 음악 전문가가 아닌 이들만이 개별 음악 전문가 그룹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음악과 관련한 보편적 인식을 주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사이드가 스스로 ‘자격을 갖춘 아마추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독자들은 저자 자신의 겸손의 언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늘날의 음악계가 처해 있는 전문화와 파편화 경향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는 그 자체로 음악 비편의 훌륭한 한 가지 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사이드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된” 비평이다.
음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가지는 고유의 쾌감과 프라이버시적인 성격은 남아있으며, 사회에서 유토피아적 지향을 낳는다. 음악의 영향력은 단순한 개별 사실로 환원되거나 조악한 현실의 반영으로 쉽게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 음악과 관련되는 여러 영역들, 가족과 학교, 계급, 남녀관계, 민족주의, 자유, 더 큰 공적 문제들에 끊임없이 침범해왔다. 특히 음악은 더 이상 사회를 반영하는 생산주체가 아닌 쾌락과 유희를 위한 대중 문화의 도구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인디씬에서 좋은 음악이 배출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전체 음악시장은 열정도, 감정의 전달도, 의식도 없는 대중의 취향만을 쫓는다. 대중의 비애를 표현하고, 사회를 비판하며 현실세계의 괴리를 폭로했던 음악의 기능은 부재하다.
대중 음악의 뿌리는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의식에서부터 왔다.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 흑인들은 슬픔의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했고 대중음악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시대를 거쳐 60년대의 음악 씬 폭발은 사회저항을 일으켰고 70년, 80년대의 펑크 무브먼트와 인디 음악은 정체성의 고민과 정치적 메시지로 무장하며 음악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음악은 죽었다.” 말한다면 너무 성급한 걸까? 음악이 사회 속에 침투하여 문화의 선봉에 서기를 바라며, 음악으로 인해 뜨거운 가슴을 갖기를 바라며, 삶의 질을 즐길 수 있는 권리에 앞장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