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이 생각나는 기억을 짚어보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던건 초등학교, 그러니까 그 시절로 따지자면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서 뭐든 빠르다지만 그 시절엔 지금보다 뭐든 느렸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사람들도. 그리고 나는 유독 느렸다.
내 바지는 언제나 무릎이 헤져있었고 머리는 한쪽으로 눌려있던지
아니면 엉망진창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손발은 항상 흙먼지투성이였다.
매일 친구들과 동네를 뛰어노는게 유일한 낙이었던 내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같은 반 친구였다.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매일 새것처럼 깔끔한 옷을 입고 오던 그 아이는 얌전하고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비롯한 남자녀석들의 짓궃은 장난에 자주 당하고는 했다.
우리가 아무리 괴롭히고 장난을 쳐도 그 아이는 한번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가끔 정말 심한 장난을 치면 그 아이는 책상에 얼굴을 박고 훌쩍거리고는 했다.
그럴때면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한테 혼이 날까봐 도망치던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그 아이에게 사과를 했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그 아이가 신경쓰였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괜히 먼저 다가가 장난을 치거나 그 아이를 괴롭히고
수업시간이나 체육시간이면 힐끔힐끔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땐 좋아한다는 감정을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알고있다해도 내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평범한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은 일종의 약점이었다.
같은 반의 친구가 누굴 좋아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당사자는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됐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그 아이를 괴롭히다가도 둘이 마주치는 상황이 되면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는 했다.
괜히 정리도 되지 않는 머리를 매만지고 지저분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면서.
중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가 오고 나서야 그 때 내가 그 아이를 좋아했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커졌지만 여전히 나는 어린애였다.
친구들이 이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도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운데 끼는 일이 많았다.
가끔 친구들이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여자애들이 나와 친한 남자애에 관해서 묻기도 했다.
그 때는 다들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다.
그냥 좋으면 좋다고 얘기를 하면 되는걸 뭘 그렇게 고민하고 머리만 싸매고 있는건지.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같은 반 친구였다.
평소에 나는 친구들 웃기는 걸 좋아했고 그 아이는 내 말에 항상 가장 크게 웃어주던 친구였다.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내숭도 없고 선머슴같던 그 친구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던 건 1학년이 끝나갈 때 쯤이었다.
어느순간부터 그 친구가 날 빤히 쳐다보면 괜히 눈길을 피하게 됐다.
그리고 그 친구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내 실없는 농담에 평소처럼 내 등을 두드리는 그 친구의 손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놀이공원에 가던 날 그 친구가 내 손을 잡아 끌었을 때
내가 이애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걸 알게됐다.
그 동안 바보같다고 생각했던 고민들이 나에게 닥치고 나니 내가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냥 '좋다'라는 말 밖에는 다른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내가 정말로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저 두글자가 알고보니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말이었다.
한 없이 단순하다가도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없이 복잡해졌다.
2학년이 되고 반이 갈리면서 우리는 전처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대신 우리는 매일 밤 전화를 했다.
집에는 아버지가 회사에서 가져 온 전화카드가 잔뜩 있었다.
나는 매일 그 카드를 하나씩 들고나가서 그 애에게 전화를 했다. 오천원짜리 전화카드는 금방 동이났다.
방금 수화기를 든 것 같은데 어느새 공중전화에선 잔액부족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가끔 아쉬운 마음에 전화박스안에서 멍하니 서 있고는 했다.
수화기 너머에선 아직도 그 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다 써버린 전화카드에 콕콕 찍혀있는 홈처럼 마음 구석 구석에 그 애가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궁금했다.
읽다 멈춰버린 책의 뒷페이지처럼 항상 그 아이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들 사이에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나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다. 언젠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하고 무작정 기다렸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의 다른 인연이 있었다.
물론 항상 즐겁고 소중한 기억이었던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새로운 책이 있다. 한 번 읽고나면 책장 구석에서 다시는 꺼내들지 않는 책이 있다.
절반도 채 읽지 못하고 내려놓는 책도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몇 번이고 기꺼이 다시 되새기고 싶은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고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된 적도 있다.
나 역시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아이는 나에게 물어봤다.
자기를 좋아했었냐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자기도 그랬다는 그 아이의 말에 우리는 그냥 웃었다.
그냥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로 넘어가기엔 너무 우습고 바보같아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한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서툴다.
그래서 간단하지만 어렵고, 복잡하지만 단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