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하여 흑백 논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것이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는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 그런데 이 ‘관계’ 라는 것이 묘한 점이 이것들을 나누는 기준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겉과 속을 구분하는 것. 이것은 그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주관으로 재해석된다. 악한 것과 선한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영화를 봐도 그렇다. 영웅과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악당은 절대 악 그 자체로 표현되지만 악당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영웅과 시민들이 악 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뫼비우스의 띠 에 주목해보면, 뫼비우스의 띠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탈피한, 기존과는 좀 다른 형태의 도형이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어느 면이 겉이고 속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왜 뜬금없이 고정 관념과 기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작품 속에 나온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알게 된다. 앉은뱅이와 꼽추는 부동산 관계자에게 매우 적은 돈만 받고 집을 잃었다. 당장 가족들과 함께 길바닥에 나앉게 된 그들은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고 그 부동산 업자를 납치해 돈을 빼앗고 불태워 버리기에 이른다. 그 마을 전체의 입주권을 싼 값에 사들이고 수많은 가족들을 속인 남자에게 마땅한 응징을 해준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에게 처벌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일이 끝난 뒤에 꼽추는 앉은뱅이에게 그와 가지 않겠다고 한다. 꼽추는 앉은뱅이의 마음이 무서워졌다고 한다. 더 이상 그들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된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위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모두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뫼비우스의 띠는 인간의 마음속을 뜻한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한 순간엔 고통을 받는 입장에서 다른 순간엔 고통을 주는 입장이 되어 있다. ‘뫼비우스의 띠’ 라는 작품은 언뜻 보면 억압받는 소시민들의 평등을 위한 투쟁을 뜻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와 동시에 세상에 이미 정해져있는 ‘기준’이라는 잣대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안과 밖은 존재하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 바깥쪽에서 선을 그리면 어느 순간엔가 선은 안쪽을 따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선을 다 그린 뒤 뫼비우스의 띠를 풀면 선은 앞면과 뒷면 모든 곳에 그려져 있다. 인간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정해진 길이 되고, 정해진 길이 올바르지 못한 길이 되더라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며 가야 했던 길로 돌아오지 않을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