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월가를 들어가며: 3학년 가을학기 (02)

menerva(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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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드디어 찾아왔다.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과 달리 새 학년이 가을학기에 시작한다. 그렇기에 9월은 동아리들이 신입을 모집하기 위해 캠퍼스 곳곳에 펼쳐진 텐트 아래서 영업을 하고, 밤이 되면 집마다 각종 술파티가 벌어지는 젖과 꿀이 흐르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 낭만의 홍수 속에서도 경영대 건물은 고립된 섬처럼 비장한 분위기였다. 호텔 로비를 연상시키는 건물 입구는 학기초부터 양복을 입고 이력서가 담긴 포트폴리오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로 분잡 했다. 바로 여름 인턴을 마친 4학년들이 졸업 후 직장을 잡는 취업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취업 기간이 낭만적인 곳이 어디 있겠냐만 취업을 위해 설립된 경영대는 학교와 기업 간에 사전적으로 조율된 취업 스케줄이 촘촘히 짜여 있었기에 분위기가 훨씬 살벌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는 9월과 10월은 4학년이 풀타임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쁜 기간이었다. 기업들은 캠퍼스를 방문해 기업 설명회를 열었고 학생들은 네트워킹을 통해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좋은 기업에 가려는 학생과 좋은 학생을 뽑으려는 기업의 줄다리기가 끝나면 숨도 돌릴 틈이 없이 여름 인턴 취업 준비를 하는 3학년을 대상으로 새로운 리크루팅 사이클이 시작됐다. 그렇게 11월과 12월은 다시 기업 설명회로 가득했고 회사들은 겨울방학 전까지 학생들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접수받은 후 이듬해 1월과 2월에 인터뷰를 진행하는 형식이었다.

경영대의 기본 철학은 약육강식이었지만 취업 시즌에는 정말 정글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1, 2학년 때는 학점으로 먹이사슬의 서열화가 이루어졌다면, 3학년 때는 그 학점을 바탕으로 누가 여름 인턴을 더 좋은 데서 하는지가 가장 큰 화재거리였다. 당시에도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지만 경영대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양대산맥은 바로 투자은행과 전략 컨설팅이었다.

4코스 요리가 애피타이저로 시작을 한 뒤 화려한 메인 요리는 후반부에 나오듯 취업 시즌 또한 비슷하게 전개가 되었다. 취업 시즌의 방아쇠는 국제 회계법인들이 당겼다. Big4라고 일컫는 PWC, Deloitte, E&Y, KPMG와 같은 회계법인들은 9월 초에 캠퍼스에 도착해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재빠르게 뽑아갔다. 그들이 퇴장하자마자 투자은행들이 캠퍼스에 하나둘씩 나타나 본 무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많은 투자은행 중에서도 소위 Bulge Bracket(BB)이라 불리는 상위권 대형 투자은행들과 부티크 은행들이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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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이후 판도가 많이 바뀌며 이제는 정의가 조금 불분명해졌지만 BB는 보통 Goldman Sachs(GS), Morgan Stanley(GS), J.P. Morgan(JPM), Bank of America Merril Lynch(BAML), Barclays, Citi, Credit Suisse(CS), Deutsche Bank(DB), UBS와 같은 글로벌 대형은행을 포함했고 부티크는 이들보다 규모는 작지만 명성이 높은 Lazard, Blackstone, Centerview, Greenhill, Evercore, Moelis, Houlihan Lokey, Rothschild 등의 은행들을 가리켰다.

투자은행들이 인터뷰를 시작하면 이에 지지 않기 위해 MBB(McKinsey, Bain, BCG)라 불리는 저명한 3대 전략 컨설팅 회사들이 학교에 등장을 했고, 나머지 컨설팅 회사들도 이들의 뒤를 이었다. 투자은행과 컨설팅 회사들이 지나가면 일반 대기업들이 학교를 찾으며 취업시즌의 후반부를 마무리 지었다. 이 외에도 헤지펀드, 사모펀드, 그리고 자산운용사들도 학생들을 직접 뽑으러 오기는 했지만 워낙 소수였기 때문에 오는 해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렇게 가을학기는 학교를 다니는 건지 아니면 취업박람회에 다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시작부터 12월까지 많은 회사들이 학교를 방문을 했다. 기업설명회가 보통 수업이 끝난 저녁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은 아예 오전부터 양복을 입고 학교로 오는 경우가 많았고 늘 명찰과 이력서를 들고 돌아다녔다. 가장 바쁠 때는 하루에 설명회를 2-3개씩 가기도 했고, 어떤 회사가 일부러 경쟁사와 같은 시간에 설명회를 계획하기라도 하면 비밀 첩보요원처럼 둘 사이를 몰래 드나들기도 했다.

많은 학생들에게 취업이 경영대의 꽃이자 열매였던 만큼 이 기간에 많은 희비가 엇갈렸고, 심화된 경쟁 때문에 학생들의 신경이 가장 곤두서 있는 때이기도 했다. 수업 사이에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이기라도 하면 모든 대화 주제가 결국 취업으로 귀결됐다. 가령 '어떤 선배가 좋은 회사에 들어가게 됐는지' 아니면 '올해는 어떤 회사에서 인턴을 몇 명 정도 뽑을 예정 인지' 등의 정보와 소문이 오갔고, 이런 루머는 학생들 사이에서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저 선배가 작년에 골드만에서 인턴을 해서 오퍼를 받았데!"


배틀로얄과 같은 이 게임에서 살아남아 좋은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결국 풀타임 오퍼를 받은 4학년 선배들은 3학년들 사이에서는 거의 반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고는 했다. 이들 중 일부는 3학년들을 대상으로 취업 카운슬러 활동을 하기도, 나머지는 각 동아리에서 저학년들을 대상으로 작은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영웅들은 의욕 넘치는 3학년들에게 자주 연락을 받았기에 후배들과 함께 커피 타임을 가지러 학교 근처 스타벅스에 하루에도 몇 번씩도 출몰했다.

이제 3학년이 된 우리들은 곧 선배들처럼 높은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지만 이 정글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직 준비할 것이 산더미였고 또 통과해야 할 관문이 너무 많았다.

창문 밖의 가을 날씨는 화창했고 캠퍼스는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경영대 건물 안에서는 올해도 여김 없이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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