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월가를 들어가며: 합격 발표 (11)

menerva(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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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위이이이잉"

 
알람도 안 맞춰놨는데 토요일 아침부터 책상 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했다. 오래간만에 잠을 푹 자고 있었는데 누군지 전화를 멈출 생각을 않는다. 이불속에서 투덜거리다 결국 폰을 집어 들었다. 모르는 뉴욕 번호였다.

"헬로?"

"어이 친구! 어제 집에 잘 들어갔어? 나야 Lee!"

 
잠결에 순간 Lee가 누군가 싶었지만 어제 뉴욕에서 인터뷰를 했던 애널리스트의 이름인 것이 기억났다.

"토요일 아침부터 미안해. 하지만 너한테 꼭 전해주고 싶은 소식이 있어서. 약속하는데 이 통화 후에 네 주말이 엄청 더 판타스틱 해질 거야.

어제 인터뷰가 끝난 뒤 팀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다들 네가 마음에 들었데. 그래서 우리 은행에서 너에게 이번 여름 인턴 오퍼를 주기로 결정했어. 어때? 대박이지?"

 
여름 인턴 오퍼라는 말에 잠이 확 깼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렸다.

"어... 정말요?! 와! 진짜 대박인데..."

"정말이야. 진짜 축하한다! 질문이 많이 있겠지만 일단 오퍼와 관련된 기본적인 것들을 좀 말해줄게.

인턴십은 6월 초부터 8월 초까지 10주 동안 진행될 거야. 10 주 후에는 퍼포먼스에 따라 졸업 후 정규직으로 채용이 될지 안 될지 결정이 날 거고.

구체적인 사항들은 월요일에 인사과에서 보낼 계약서에 적혀있겠지만 연봉은 1년 차 애널리스트와 동등한 7만 불. 물론 52주가 아닌 10주 동안만 일을 하니 실제로 받는 건 1만 4천 불이 좀 안 되겠지?

보너스는 따로 없지만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2천 불을 기념으로 보내줄 거야. 그리고 뉴욕 주 노동법상 인턴은 주 40시간 이상을 근무하게 되면 추가 수당을 받을 수 있어. 잘 알다시피 투자은행 애널리스트들은 일주일에 보통 80시간 이상씩 근무를 하니깐 열심히 하면 여름 동안 돈을 좀 짭짤하게 벌 수 있을 거야."

 
Lee가 얘기해주는 것들을 하나씩 종이에 적어나갔다. 한국에서 인턴을 할 때는 한 달에 백만 원도 못 받았었는데 갑자기 10주 동안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준다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오퍼를 받으니깐 기분이 좀 어때?"

 
Lee가 웃으며 물어보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운이 좋게도 첫 인터뷰에서 오퍼를 받아 기분이 너무 좋았지만 아직 다른 은행들의 인터뷰도 많이 남아 있었기에 오퍼를 선뜻 받겠다고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정말 좋죠.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아직 잘 실감이 안 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음... 워낙 중요한 결정이니 저 혼자서 대답을 하기엔 그렇고... 시간을 갖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랑 상의도 좀 해봐야 할 것 같네요..."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가족 핑계를 대면서 둘러댔다. 그러니 Lee도 대충 무슨 말인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래 무슨 말인지 다 알아. 중요한 결정일 테니 시간을 갖고 좀 생각해봐.

다만 이 오퍼에는 시간제한이 있어. 오늘이 토요일이니깐 앞으로 2주 후 금요일까지 우리 은행에 올 건지 안 올 건지 말을 해줘야 돼. 만약 그때까지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이 오퍼는 자동으로 파기가 되거든."

 
소위 말하는 'exploding offer'였다. 학생들이 받은 오퍼를 발판으로 다른 은행으로부터 인터뷰를 따내는 것을 막기 위해 은행들이 이런 조건부 오퍼를 주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들었다. 보통 1-2주 정도가 됐지만 24시간을 주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학교 측에서는 힘없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캠퍼스를 통해 채용을 하는 회사들에게 이런 조건부 오퍼를 금지시켰지만, A 은행같이 머리를 굴려 학교를 통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는 경우 딱히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사회나 온라인이나 어뷰징을 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다면 뭐든 가능한 법이었다.

하지만 일단 미국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기에 감사한 것도 사실이었다. Lee에게 기간 내에 꼭 연락을 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직 한국도 시간이 너무 늦지 않은 것 같아 집에도 전화를 드렸다.

부모님께서는 기뻐하며 축하를 해주셨다. 다만 오퍼의 유효기간이 2주밖에 없는데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보셨다. 나는 아직 1차 인터뷰가 많이 남았고, 그중에서는 오퍼만 받을 수 있다면 A 은행보다 더 가고 싶은 곳들도 있으니 일단 시간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도전을 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Lee의 말대로 오퍼를 받고 나니 남은 주말을 정말 상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는 혼자 생각을 하며 앞으로 2주의 계획을 짜 봤다. 아직 10개의 1차 인터뷰가 남아 있었고 그중 8개는 투자은행 그리고 2개는 컨설팅 회사였다.

원래는 겨울방학 동안 컨설팅의 케이스 인터뷰를 준비할 생각이었지만 대부분의 방학 계획이 그렇듯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터뷰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데다 컨설팅보다 조금 더 마음이 끌리는 투자은행에서 이미 여름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다른 사람의 자리를 뺏어가며 인터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사실 컨설팅 업계는 정규직 채용에 필요한 인원의 절반 정도만 인턴을 통해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반해 투자은행은 1년 차 애널리스트의 대부분을 여름 인턴을 통해 뽑는 추세였다. 즉, 투자은행에서 인턴을 하지 않고 정규직 채용에 뽑히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컨설팅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용이했다. 게다가 은행들은 정규직 채용을 할 때도 은행 인턴 경력이 적혀있지 않은 이력서는 웬만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많은 고민 끝에 컨설팅 인터뷰를 과감히 취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만약 여름 인턴이 끝난 다음에도 컨설팅에 대한 여운이 남는다면 그때 다시 도전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그런 다음 나머지 1차 인터뷰 리스트를 살펴봤다. 사실 월가를 주무르는 bulge bracket 은행이면 다 좋은 곳이지만 한국에 명문대 서열이 있듯 투자은행 간에도 서열 같은 게 있었다. 내가 합격한 A 은행의 경우 8개의 대형은행 중 '하위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오퍼를 받고 기뻤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1차 인터뷰 8개 중 bulge bracket 은행은 3곳 (한 은행의 두개의 다른 오피스로부터 인터뷰를 받았다) 그리고 부티크 은행은 4곳이었다. 그중 bulge bracket 은행 1곳은 A 은행과 서열이 비슷한 만큼 굳이 인터뷰를 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월요일이 되면 컨설팅 인터뷰와 함께 그 은행으로부터 받은 인터뷰 2개도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월요일이 아침이 되자 A 은행의 인사과로부터 오퍼 레터가 첨부된 이메일이 도착했다. PDF 파일을 열어보니 토요일에 Lee가 얘기했던 내용들이 적혀있었고 이를 차례대로 읽으니 합격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실감 났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2주 뒤 금요일까지 답변을 하지 않으면 계약서가 파기된다는 내용도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2주 뒤에 걱정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경영대의 커리어 센터를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빼려고 찾아왔습니다."

"네?"

 
데스크의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인터뷰 합격자 명단에 넣어달라는 하소연은 수 없이 많이 들어봤겠지만 빼 달라는 건 처음 들어봤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난주에 은행 한 군데서 오퍼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인터뷰를 안 하고 싶은 회사 몇 군데서 제 이름을 빼고 싶어서요."

"아...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인터뷰를 총괄하는 담당 직원이 준비가 될 때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려달라고 했다. 잠시 뒤 준비가 되었으니 오피스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인터뷰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빼 달라고요? 무슨 일인지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담당 직원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제가 지난주에 뉴욕에서 A 은행과 인터뷰를 했는데 운이 좋게도 여름 인턴 오퍼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말 동안 고민한 끝에 A 은행보다 덜 가고 싶은 은행 1군데와 컨설팅 회사 2 군데서 받은 1차 인터뷰 명단에서 제 이름을 빼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보다 그 회사에 더 가고 싶은 친구들한테 인터뷰 자리가 가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오호라. 참 기특한 생각이네요. 무슨 마음인지 알겠습니다. 다만 한번 결정하면 번복할 수 없는 것 알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요?"

"네. 확실합니다. 아 그리고... 사실 A 은행에서 조건부 오퍼를 받았는데 이럴 경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요? 2차 인터뷰에 올라가도 잘못하면 시간이 빠듯해서 면접을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조건부 오퍼라는 말에 담당 직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건부 오퍼요?! A 은행 이 놈 자식들 예전에도 그러더니 망나니 짓을 또다시 하네. 얼마나 시간을 줬어요?"

"아 그게... 2 주요."

"저희가 캠퍼스를 통해 채용을 하는 회사들에겐 조건부 오퍼를 금지시키는데 A 은행같이 우회하는 회사들의 경우 사실 제제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없어요. 제가 항의하는 이메일을 인사과에 보내긴 할 테지만 조건 자체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안타깝지만 다른 은행과 인터뷰를 할 때 상황을 잘 설명하고 데드라인이 언제인지 확실하게 얘기해주는 방법 외에는 없을 것 같네요."

 
바뀌는 사실은 없었지만 누군가 내 편에 서서 같이 화를 내준다는 게 좋았다. 고맙다고 말을 하며 일어서니 되려 다른 학생들을 위해 배려를 해줘서 고맙다고 일어나 악수를 했다.

4곳의 인터뷰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지고 대기자 명단에 있던 학생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두 컨설팅 회사의 대기자 명단에서 이름이 올라간 적이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내 작은 행동이 누군가의 미래를 바꿨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니 조금은 뿌듯하기도 또 신기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4학년 때 다시 지원을 할 수도 있는 만큼 두 컨설팅 회사 인사과에는 따로 상황을 설명한 뒤 인연이 닿으면 다시 지원하겠다고, 또 감사하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이제 최종적으로 남은 1차 인터뷰는 6개. 첫 면접은 화요일 아침 아홉 시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1주일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퍼를 이미 하나 따 놓았으니 밑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히 임하기로 했다.

그렇게 새로운 인터뷰 릴레이가 시작됐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 3학년 가을학기 (02) / 위험한 구애활동 (03) / 3분짜리 이야기 (04) / 선배와의 통화 (05) / 두 가지 선택 (06) / 첫 인터뷰 (07) / 레디 인터뷰어 원 (08) / 불길한 시작 (09) / 첫 최종면접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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