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를 들어가며]는 뉴욕의 투자은행에 취직하기까지의 제 이야기를 각색한 연재 수필입니다. 지난 편은 본문 밑에 링크되어 있습니다.
입사 지원서를 넣기 전에 결정할 중요한 질문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은 투자은행과 전략 컨설팅 회사에 동시에 지원할 것인지였다.
투자은행과 전략 컨설팅은 경영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양대산맥이었다. 두 업계 모두 명성이 탄탄했기에 이력서에 넣기 좋았고, 투자은행의 경우 높은 연봉과 보너스를 제공하는 만큼 많은 학생들의 취업 희망 1순위였다.
컨설팅 업계의 연봉은 투자은행보다는 낮았지만 2-3년 경력을 쌓은 주니어 컨설턴트들을 좋은 MBA에 진학시키는 것으로 유명했고, 일부 회사의 경우 졸업 후 돌아와 다시 일을 하는 조건으로 MBA 학비도 지원했기 때문에 투자은행 못지않게 인기가 많았다.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업계에서 일을 하는 분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또 지인들로부터 내 성격이 투자은행보다 컨설팅에 더 맞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일반적으로 경영대에서 투자은행은 '엑셀로 무식하게 일 많이 하는 대신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했고, 컨설팅은 '파워포인트로 장표 그리면서 뜬 구름을 많이 잡는 대신 최고의 MBA 준비코스'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나도 MBA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던 만큼 한때 [맥킨지는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라는 책을 읽으며 전략 컨설팅에 대한 로망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투자은행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게 나중에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업계로 이직을 할 때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다. 사모펀드에 투자은행 출신들이 워낙 많다 보니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결국 MBA와 사모펀드 둘 중 내 인생에 뭐가 더 중요한지가 핵심이었다. 사실 간단한 해결책은 양쪽 다 지원을 하는 것이었지만 두 업계가 인터뷰 형식이 아예 달랐기에 학업과 병행하며 이를 다 준비할 자신이 없었다.
투자은행의 경우 인터뷰에서 회계와 기업금융에 관련된 기술적인 내용들을 많이 물어봤다. 예를 들어 재무상태표 (Balance Sheet) - 손익계산서 (Income Statement) - 현금흐름표 (Statement of Cash Flows)가 서로 어떻게 연결이 되어있는지를 묻거나 아니면 기업의 가치를 측정하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간혹 가다 기업금융에 관련된 케이스를 물어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몇 분 안에 풀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었다.
컨설팅의 경우 10-30분 정도 소요되는 케이스 인터뷰를 진행했다. 면접관이 시니어 컨설턴트 그리고 면접자가 주니어 컨설턴트의 역할을 맡아 가상의 클라이언트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일종의 역할극이었다. 면접관이 짧은 지문을 제공하면 면접자는 스무고개를 하듯 필요한 정보를 질문을 통해 얻어내야 했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구조화시킨 다음 궁극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과정이었다. 워낙 독특한 인터뷰 형식이었기에 케이스 문제집을 사서 따로 공부를 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컨설팅보다 투자은행 인터뷰에 더 자신이 있었다. 예전부터 기업금융 공부를 많이 했고 또 금융회사에서 인턴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영대에 돌아다니는 각종 기출문제집도 많이 풀어봤고 또 친구들과 모의 인터뷰도 많이 준비한 상태였다. 컨설팅의 경우 케이스 문제집을 많이 사놓기는 했지만 투자은행 인터뷰만큼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기에 준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오랜 고민 끝에 양쪽에 지원서를 넣기로 결정했다. 대신 겨울방학 전까지는 투자은행 인터뷰 준비에만 집중하고 컨설팅 케이스 인터뷰는 방학 때 한국에서 준비를 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다행히 컨설팅 인터뷰가 투자은행 인터뷰보다 2주 정도 늦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질문은 투자은행의 뉴욕과 홍콩 오피스에 동시에 지원을 할 것인지였다.
대부분의 투자은행들은 뉴욕 외에도 홍콩과 같은 세계적인 대도시에 오피스가 있었다. 미국 오피스들이 3학년 2학기인 1월부터 인터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반면 홍콩 오피스들은 이르면 11월부터 인터뷰를 진행했다.
많은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이런 인터뷰 스케줄을 이용해 홍콩 오피스에 먼저 지원을 한 다음 미국 오피스에 지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홍콩 오피스에서 오퍼를 먼저 받는다면 미국 취업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훌륭한 대안을 손에 쥔 것이고, 오퍼를 받지 못하더라도 미리 인터뷰 준비를 할 수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주위의 친구들도 이런 식으로 준비를 많이 했다.
이 논리에 동의를 했으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미국에서 직장을 얻으려면 학점관리와 인터뷰 준비 외에도 네트워킹을 많이 해야 했다. 네트워킹에는 선배들한테 보내는 콜드 이메일과, 엘리베이터 피치, 그리고 전화통화와 같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작업들이 포함됐다. 만약 홍콩 오피스를 함께 지원하면 추가되는 인터뷰의 양과 학업 사이에서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였다. 그물을 최대한 넓게 펼쳐 뭐라도 잡을 것인지, 아니면 확률이 희박하더라도 낚싯대를 띄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확실히 얻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됐다.
삶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게 되었다.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요즘 투자은행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데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봐야 되지 않겠어?"와 "네트워킹 해봤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 본인이 정말 노력하면 인터뷰, 네트워킹, 학업 모두 다 잡을 수 있지 않을까?"와 비슷한 류의 조언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혼자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한 MBA 선배께서 해주셨던 질문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어느 오피스를 지원할지 전략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너는 어디서 일을 하고 싶은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으로 나를 설득하려 했던 반면 선배는 오히려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 내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진정으로 일을 하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홍콩도 물론 훌륭한 도시였지만 나는 졸업 후 미국에 남아 일을 하고 싶었다. 물론 미국 M&A 시장의 크기가 훨씬 더 크고 또 선진화된 금융 기법을 배우고 싶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예전에 거실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꿨던 꿈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국의 투자은행을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월스트리트에서 뉴욕을 느끼고 싶었다. 설령 홍콩에서 가장 명성이 좋은 은행중 하나인 골드만 삭스와 미국에 소재한 B급 투자은행에서 동시에 오퍼를 받더라도 나는 두 번째 옵션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선순위가 명확해지자 그다음 결정들은 더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나는 결심대로 홍콩 오피스에 일채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미국에서 외국인 비자를 지원해주는 투자은행은 어느 도시가 됐든 모두 다 지원을 했다. 그리고 홍콩 오피스를 포기한 만큼 지원한 각 은행마다 졸업생들과 네트워킹을 철저히 진행했다.
결론적으로는 이런 선택과 집중을 통해 미국에 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 결정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 선택이 옳다고 믿었지만 홍콩에서 인터뷰와 오퍼를 받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났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존버'밖에 없었다.
<초한지>에 나왔던 항우의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 항우는 막강한 진나라의 군대와 싸우기 전 병사들에게 "타고 왔던 배를 모두 부숴 침몰시키고, 3일분의 음식을 만든 후 모든 밥솥을 깨뜨리라"고 명령을 했다. 궁지에 몰린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더니 결국 승리를 했다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더 단호한 결의를 갖고 취업에 다시 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올인'을 한채 은행별로 이력서와 지원서를 하나씩 작성해 나갔다. 같은 은행이라도 여러 지점이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12월 중순까지 총 15 군데 가까이 지원을 했다.
기말고사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컨설팅 케이스 인터뷰를 준비해야 했지만 초조한 마음에 친구들과 모여 밤마다 술잔만 꺾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축하드립니다. 귀하의 이력서와 지원서를 검토한 결과 1차 인터뷰를 진행하기를 원합니다."
미국에 남기 위한 나의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월가를 들어가며:
프롤로그 (01) / 3학년 가을학기 (02) / 위험한 구애활동 (03) / 3분짜리 이야기 (04) / 선배와의 통화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