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창업과 통합의 리더십 : 테세우스 (2)
테세우스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 그럼에도 아버지로부터 사실상 버림을 받은 상태로 자라났다. 출생의 비밀로 둘러싸인 이런 이야기 전개는 어디에서 들은 것 같지 않은가?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 그랬고,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 역시 비슷한 경우였다. 여기서 우리는 과감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가 있다. 주몽과 유리, 그리고 테세우스가 우리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할 위험성은 없으니까 말이다.
고대 설화에서 신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은 십중팔구 아주 미천한 태생에 속하다고 봐야 한다. 왜냐? 그들은 친부의 초라한 실체가 알려지는 것이 본인에게 득 될 것이 없다고 계산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가 기술한 테세우스의 가계도를 관찰해보면 테세우스야말로 전형적인 금수저로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가 이후에 겪을 모험담, 정확히는 고생담을 감안한다면 그는 입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기보다는, 차라리 죽은 다음 무덤에 금수저가 꽂혔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진실에 부합할 듯하다.
모계사회의 영향과 잔재가 아직도 깊고 넓게 남아 있던 시대였다. 그 결과 고대의 영웅들은 거의 모두가 모친 쪽의 핏줄이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테세우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외증조부 펠롭스는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군주들 가운데 제일 힘센 왕이었다. 재물도 많았지만 자식도 많았던 까닭에서이다. 자식이 많았다는 것은 그의 아이를 낳아줄 여자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고대의 전쟁은 약탈 전쟁이었고, 여자는 일차적 약탈 대상이었다. 풀이해 말하면 펠롭스는 싸움에 아주 능숙했다는 뜻이다.
펠롭스의 아들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각기 그 땅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그의 딸들은 신분이 고귀한 자들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아비의 권력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줬다. 핏테우스는 펠롭스의 수많은 아들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트로이젠을 세운 다음 그곳을 직접 다스리고 있었다. 트로이젠은 그리 크지 않은 도시국가였고, 핏테우스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지성인으로 통했다. 힘이 곧 정의로 통했던 무법천지의 고대사회에서 트로이젠이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으리라. 어쩌면 핏테우스느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불운한 천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핏테우스의 지혜와 박식함이 무용지물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가 했다는 말이 호메로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서사시인인 헤시오도스의 작품에도 나와 있기 때문이다.
“아끼는 사람에게 약속한 대가는 충분하고 확실해야 한다.”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에 수록된 이 얘기는 나중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또다시 인용되었다.
외할아버지가 등장했으니 친할아버지도 출연해야 균형이 맞을 게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테세우스의 부계에 관한 사연은 아버지 아이게우스로부터 시작된다. 아이게우스는 개천에서 태어난 용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아이게우스는 아테네의 왕이었다. 이때의 아테네는 우리가 상식선으로 알고 있는 고대 아테네와 비교해 대단히 작은 규모였다. 즉 기껏해야 조금 큰 마을 수준이었을 테니 아이게우스는 실상은 촌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게우스는 자식이 없었다. 지금은 자식이 없으면 당연히 불임 클리닉을 찾아간다. 이 시대에는 사제를 찾아가 신탁을 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떤 여자와도 잠자리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며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신탁을 전했다.
위대한 지도자여, 포도주 자루의 끝을 풀지 말라.
다시 아테네에 이르기 전에는.
아이게우스는 신탁의 내용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만물박사로 존경을 받는 핏테우스를 방문해 궁금증을 풀려고 했다. 핏테우스는 신탁의 참뜻을 즉시 단박에 알아챘다. 아이게우스는 위대한 지도자이므로 그를 취하게 만들어 씨앗을 받아내라는 것이었다. ‘포도주 자루의 끝’은 남성의 성기를 가리켰다. 몹시 야한 뉘앙스를 풍기는 신탁이었다. 핏테우스는 아이게우스가 잠든 방에 자신의 딸을 들여보냈다. 근대적 인권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때인지라 핏테우스의 딸 아이트라에게는 술에 곯아떨어진 아이게우스와 아버지의 명령대로 동침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게우스가 아이트라의 임신 징후를 감지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짧고 진하게 하룻밤 즐기는 식으로 트로이젠을 거쳐 가지는 않은 듯하다. 적어도 몇 달 동안을 아이트라 곁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신의 피붙이가 세상에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기는 핏테우스나 아이게우스나 50보 100보였다. 아이게우스는 태어날 아이가 제 핏줄임을 증명할 수 있는 징표로 칼과 가죽신을 큰 바윗돌 밑에 숨겨놓은 다음 이 사실을 아이트라에게만 조용히 귀띔해줬다. 그는 만약 아들이 태어나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너끈히 옮길 수 있도록 장성하게 되면 부자 상봉의 단초가 될 이 물건들을 숨긴 장소를 아이에게 알려줄 것을 아이트라에게 은밀하게 당부한 다음 트로이젠을 떠났다.
아이게우스가 이토록 광적으로 보안에 집착한 것은 팔라스의 아들들이 몹시 두려웠던 탓이다. 그렇다면 팔라스의 아들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