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사 하 는 밤
우르슬라는 노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간다는 사실을 감춘다. 장님이라고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사람들의 소리로 거리감을 측정하고, 냄새로 사물을 인지하는 방법을 터득한 후에야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르슬라는 완전히 장님이 된 후에도 네 가지의 감각으로 가족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날마다 같은 길만 돌아다니고, 같은 행동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가족들이 날마다 반복하는 패턴에서 벗어날 때만 물건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도 발견한다.
하루는 며느리인 페르난다가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소란을 피운다. 페르난다는 날마다 자기가 지나다니는 곳만 열심히 찾아본다. 그러나 그날 페르난다에게 다른 날과 달랐던 사건이 있었는데 침대에서 빈대가 나와서 매트리스를 햇볕에 말린 일이었다. 우르슬라는 그 빈대 소동 때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반지를 빼서 두었으리라는 결론을 얻고 침대 옆 높은 선반을 지목한다. 선반 위에는 정확히 페르난다의 반지가 있었다.
오늘 저녁에 [백년 동안의 고독] 중, 이 대목을 필사했다. 우르슬라의 관찰을 통해 내가 얼마나 반복된 패턴으로 장소와 시간과 사건과 사람을 대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늙으면 나이를 핑계삼아 관찰을 잘 하지 않는 것 같다. 또한 배려를 하기보다는 배려 받기를 원한다. 반복되는 패턴이 만든 고정된 분석틀로 세상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하면 분석틀도 변주되어야 한다. 우르슬라는 자신이 퇴물이 될까 봐 너무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눈이 멀 조짐이 보일 때, 네 가지 감각을 새롭게 개발하는 신공을 발휘한다. 그녀는 시력이라는 분석틀을 과감하게 버리는 동시에 노화까지도 극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타인을 배려하는 입장에 선다. 우르슬라야말로 '전사'의 호칭에 걸맞는 사람이 아닐까.
새벽에는 하우스메이트 미쉘양의 어머니와 식사를 같이 했다. 미쉘양의 어머니는 울산에 사는데, 두 달에 한 번 계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주무신다. 나와 미쉘양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는 거실에서 창밖을 구경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나를 안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존댓말을 한다.
어머나 **씨, 여기가 서향인데 빛이 이렇게 거실까지 밝게 들어오네요. 모르는 사람은 동향인 줄 알겠어요. 저기 저쪽 건물 유리에 반사된 빛이 이까지 오는 거예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예순이 넘은 그녀가 우리 거실이 어떻게 서향인 줄 알았을까. 불을 켜지 않았는데도 거실이 환한 이유가 맞은편 주상복합 건물의 유리창때문이란 걸 알아낸 것도 신기했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지 않고 내 의견을 물어본 것도 놀라웠다.
처음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을 때, 미쉘양이 우르슬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걱정을 조금 덜한다는 것뿐, 미쉘양은 우르슬라처럼 항상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맞힌다.
미쉘양과 같이 가게를 할 때, 9개의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의 말소리를 동시에 들으며 각각의 요구에 재빨리 대처를 하는 그녀가 신기하기만 했다. 미쉘양은 생활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늘 왜 그런지 호기심을 가진다. 아인슈타인처럼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간단한 몇 가지 가설을 말한 후,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곤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어릴 때부터 미쉘양의 어머니가 미쉘양에게 모든 집안일에 대해 -심지어 돈 문제까지- 마치 어른을 대하듯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질문에 대답하려면 관찰에서 비롯된 자기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해야 한다. 아마 미쉘양이 가지고 있는 관찰의 미덕과 화술은 어머니에게서 왔으리라.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미쉘양과 어머니를 보면서 우르슬라1, 그리고 우르슬라2라고 마음속으로 번호를 매겼다. 물론 미쉘양은 레메디오스처럼 아름답지만, 레메디오스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의 레메디오스들은 아기를 낳다가 죽거나 하늘로 승천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