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한테 밥주기로 했는데 왜 슬픔이 니가 다 쳐먹니???

lekang(62)
Published in
#kr
Words
533
Reading
3 min
Listen
Play
8y
  1. 삼촌의 집에서 깼다. 07:30분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술을 마신 다음날은 아침 일찍 눈이 떠지지만, 소금에 절여진 것처럼 몸이 아프다. 엔진에 기름 대신 모래를 넣고 달리는 자동차가 된 기분이다. 엎드려서 폰을 뒤적이며 끙끙대다, 어젯밤 일들을 기억해낸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들어갔고, 삼촌에게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고, 술을 꽤 많이 마셨고 양꼬치를 먹었으며 소주와 맥주 이과두주를 섞어 먹었다. 술에 취해 많이 짖었다. 으르르릉. 재미있긴 했다. 어제 술을 사 주신 no1smile@no1smile님에게 감사의 인사.

기쁨이.PNG

내가 보는 기쁨이의 얼굴

남이 보는 기쁨이.PNG

남이 보는 기쁨이의 얼굴.

  1. 어제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고 출근하기 싫어서 삼촌 집에 모셔놓은 내 양복을 입었다. 삼촌 집에서 이사하기 전에 세탁소에 맡겼었는데, 찾는 걸 깜빡해서 삼촌이 대신 받았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돈을 선불로 냈던 것 같은데, 세탁소는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하며 삼촌에게 돈을 받았다. 삼촌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같은 조카가 있는 것인가?

  2. 삼촌 집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30분이 걸린다. 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20분동안 걸었는데 4km중 2km밖에 못 왔다. 내 기억력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 세탁소를 욕할 수 없지. 중간에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3. 열심히 테이스팀의 문구를 썼다. 글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말라간다. 책을 읽지 않으면 글이 마른다.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언어가 마른다.

  4. 점심시간에 밥 먹은 후 우노를 했다. 회사 동료에게는 위에서 한 장, 나한테는 밑에서 한 장. 근데 패를 섞을 때 잘못 섞었는지 자꾸 똥패가 들어왔다. 덕분에 커피를 사줘야 했다. 다음번에 더 크게 뜯어먹기 위해 잠시 쉬는 거라고 생각하자.

  5. 테이스팀의 문구를 쓰고 문제점을 찾고 설문조사를 만들었따.

  6. 퇴근하면서 한강의 '흰'을 읽었다.(5600번 버스의 자리가 많이 남아서 기분 좋게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본 흰 것들에 대한 글이었다. 흰 대문, 흰 구름, 24시간동안 지속되는 낮, 물이 잔뜩 섞인 눈, 무대에서 강렬하게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배내옷, 그 외의 수많은 흰 것들. 책은 얇디 얇았지만 문구를 이해하기 위해 같은 지점을 몇번씩 다시 읽었다. 입 속에서 소설의 문장을 굴리고 굴렸다.

  7.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내가 매일 여닿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8. 사는 집의 문을, 못으로 긁어 녹이 슬도록, 301호라고 새기는 사람은 자기 둥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겠지. 나는 내 양복을 사랑한다. 다른 옷들은 가끔 던져놓고, 구겨져도 신경쓰지 않지만 양복은 다르다. 곱게 세탁소에 맡기고, 찾아다 정성스레 걸어 놓는다. 내가 직접 가게에서 치수를 재고, 테일러가 나를 위해 옷을 만들어주고, 구두를 해 주고, 몇 번이고 수선해 줬으니까.

  9. 집에 와서 재활용 쓰레기들을 버리고 청소를 하고 책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여동생이 집에 와서 더 피곤하길 바라지 않으니까. 내가 쓰레기 사이에 파묻혀 글을 쓰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나를, 여동생을 사랑하니까. 여동생이 어제 빨래를 돌려놓고 너는 걸 깜빡했다며, 세탁기좀 다시 돌려달라고 할 때 한숨을 푹 내쉬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사고에 대해 화를 내는 건 무의미한 일이니까. (그니까 내가 전기장판 켜놓고 가도 좀 봐줘)

  10. 하지만 빨래를 개며 괜히 심통을 부렸다. 오리너구리처럼 '카악-'하고 소리를 낸다던가, '왜 이렇게 다 이것저것 부숴버리고 싶지' 하고 여동생에게 투덜거린다던가. 세상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다. 음, 정말 무의미하군!!

  11. 약속 잡은 게 깨져서 투덜거렸다. 세상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분명히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내 마음만 바꿀 수 있는 것인데. 제발 손을 놔 달라고 간청해 보지만 사실은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이다!

  12. 밝고 유쾌하게 살고 싶은데 잘 안된다!!

  13. 오리너구리 꽥꽥!!!!!!!!!!

  14. 다들 좋은 밤 되세요.

  15. 오늘의 기쁜일 -
    5600번 자리가 널널해서 흰을 읽었다
    일 있던게 사라져서 독서 모임에 갈 수 있게 됐다
    기침이 사라졌다. 만세!! 건강한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테이스팀 테스트가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이예!!
    통화했다!!
    책상이 깨끗해졌다!
    집안일을 반벽하게 해냈다(어느 정도 완벽한 상태를 이른다)

기쁨이한테 밥주기로 했는데 왜 슬픔이 니가 다 쳐먹니???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