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내 안의 그늘그늘한 그늘들.
그곳을 다시 지나가려면
눈 감고 건너야 할 것 같아
나는 보드게임을 좋아한다. 삼촌이 카탄을 가져왔을 때부터 보드게임을 했으니 초등학교 2학년부터 시작한 셈이다. 삼촌은 카탄밖에 하지 않지만, 나는 간간이 친구들과 함께 다른 보드게임도 즐기게 됐다. 저번에는 텀블벅으로 보드게임을 하나 샀다. 룰은 간단한 게임이었다. OX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낸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O인지 X인지 맞춘다. 끝. 역시 심플 이즈 베스트다.
플레이어의 과반수가 맞추면 질문자는 점수를 얻지 못한다. 플레이어의 과반수가 틀리면 1점이다. 대학교 후배들이 한 질문을 예시로 쓰고 싶지만, 여기에 썼다간 NSFW를 붙여야 하니 그만둔다. 혜지야 너 그러다 진짜 대자보 붙어.
설날 때 가져가서 가족들과 해 보니 남동생이 질문을 잘 낸다. '여자친구와 연애한 지 6개월이 지났다'는 문제로 모두를 틀리게 해서 1점을 획득했다.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걸 어떻게 맞추니? 내 동생이지만 너무 숭악한 놈이다.
이 게임의 핵심은 O인지 X인지 헷갈리는 문제를 내는 것이다 . '르캉은 우울한 성격이다' 문제를 내며, 가족들이 맞출 수 있을까 궁금해한다. 이모와 남동생은 O를, 여동생과 엄마, 삼촌은 X를 냈다.
1점 획득.
내게는 가족들도 모르는 그늘이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놀고, 행복하다가도 그늘이 나타난다. 그늘은 오늘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너를 싫어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귀를 막지만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를 곧 떠나갈 거고,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갖지 못할 거야- 항상 그랬었잖아.
나는 그늘이 틀렸다는 걸 확인시켜주려고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늘이 이기는 날도 있고 내가 이기는 날도 있다. 그늘은 분명히 내 안에서 나왔지만 왜 그늘을 쫓아내려면 다른 사람의 확인이 필요한 걸까.
해결책은 오직 그늘과 싸워 이기는 것뿐인 걸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다. 이빨이 아플 때 치과에 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귀찮고 무서우며, 돈도 드니까 진통제를 먹고 건강치약 따위를 쓴다. 본질적인 문제는 직접 마주치기 무섭다. 나도 그렇다. 진통제를 먹듯 누군가에게 확인을 갈구한다. 그렇게, 문제에서 도망친다.
마음속에는 두 마리 늑대가 산다. 한 마리의 색깔은 흰색이고, 이름은 기쁨과 행복, 사랑이며 감사다. 다른 한 마리는 검은색이고, 의심이며 절망, 그늘이자 슬픔이다. 두 마리는 항상 싸운다. 둘 중에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당신이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나는 언제나 그늘에게 먹이를 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늘에 먹이를 준 적도 있었다. 검은 늑대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대로 뒀다면 아마 슬픔에게 물려 죽었겠지.
그러나 예전, 나 대신 기쁨에게 먹이를 준 사람이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그곳을 들락거렸고(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2년간 딱 하루 빼고 매일 드나들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던 기쁨은 천천히 기운을 회복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시간들은 부드러웠고, 기뻤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이런 감사한 일도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2년의 시간동안 기쁨을 돌보는 법은 배우지 못했었다. 누군가가 떠나고 오랫동안 헤맸었고, 나 대신 기쁨에 밥을 줄 사람을 찾았던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 일기를 쓰고서야 느낀다. 평생 기쁨을 돌볼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몰래 고백하자면, 근 2년간 드물게 그리고 대충 일기를 썼었다. 고통의 뿌리를 뒤져보는 건 더 큰 고통이었으니까 대충 내 마음을 읽고 대충 글을 썼다. 그래서 슬픔들은 더 커지기만 했었다.
실체를 모르던 슬픔들은 씀으로써 명확해진다.
마음 늑대 기르기 가이드 머릿말 - 행복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찾아들 것이오, 우울한 일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우울한 일들이 너를 찾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있다. 그러나 무너진 모래성 앞에서 영원히 울고 있을지, 아니면 눈물을 닦고 일어나 걸어갈지 선택하는 건 나 자신이다. 오늘부터 피둥피둥 살이 찐 그늘이를 다이어트 형에 처하고, 흰 늑대에게 먹이를 줄 생각이다. 미안해 기쁨아. 오랫동안 너에게 밥을 주는 걸 잊고 있었단다. 날 용서해 줄래, 오늘은 같이 자자꾸나.
어제 밥을 먹다 송곳니가 깨졌다. 오늘 아침에 바로 치과에 갔다 왔다. 몸의 고통은 이렇게나 뚜렷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알기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몸의 고통에 직면해서 다행이다. 치과 치료를 받듯, 내 마음도 나을 수 있길.
P.S 마음의 고통을 알기에는 일기가 제격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