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단상: <홍길동전>과 허균, 그리고 이탁오
홍길동전이 개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런가. 홍길동이 재상인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로 한 것은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의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자라는 자신의 서러운 처지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집을 나가서 장길산처럼 되리라 했다. 심지어 자신의 어미가 받는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개인의 억울함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불합리한 제도가 문제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 들어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좀 진부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 쪽으로 가지 않는다. 비록 홍길동이 탐관오리를 벌하고 빼앗은 것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는 한다. 여기까지는 선정을 베푸는(베푼다는 건 말도 안되지만아무튼) 태평성대라면 시스템에서도 하는 일이다. 그러나 홍길동은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벼슬, 병조판서가 되고서는 임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뢰배와 함께 관아를 치고 조정을 시끄럽게 한 것은 신의 이름을 드러내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장길산은 허균[許筠, 1569~1618]이 죽고도 한참이 지난 뒤인 1692년(숙종 18년 12월)에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만일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이라면 이야기 시작 부분에 장길산이 등장할 리가 없다(참고로 홍길동은 1500년에 실록에 등장하고, 임꺽정은 1562년에 사형당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홍길동전>은 19세기 중반에 필사된 것이다. 그 필사본에 장길산이 등장한다. 그러니 우리가 읽는 <홍길동전>의 모본을 설사 허균이 썼다고 해도, 바로 그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홍길동은 자신이 단지 서자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고 서러워했다. 그런데 그 태생적인 차별에 대한 고민은 단지 자신에게 한정될 뿐이다. 자신의 어미가 시비(侍婢), 계집종이 아니었던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기는 차별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어미에 대한 판단은 어떠했을까? 서얼에 대한 차별로 억울했다면, 그 생각은 단지 신분만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옛날 일을 지나치게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판한다고 지적하는 독자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꼭 그렇지 않다. 허균이 살았던 시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된 신분제도를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의 발달이 아니었나 싶다. 돈 중심으로의 시스템 변화는 신분계급으로 지탱하던 옛날 시스템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 첫 번째 공격목표가 신분에 의한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었다. 만인의 평등 어쩌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명분이고, 간판이고, 정치적인 수사법일 뿐이다.
서양 이야기 아니냐고? 아니다. 허균은 <삼국지연의>나 <수호전>만 읽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 유행하던 중국 공안파의 영향을 받았다. 원굉도(袁宏道, 1568~1610)의 ≪원중랑집≫을 즐겨 읽었고 원굉도의 스승인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 ≪분서≫를 비롯한 저서들을 읽었다. 이탁오는 "남녀평등"까지도 언급했던 대단히 개혁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허균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는 <호민론豪民論>에서 오랑캐나 창고지기에서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허균이 살아 있을 때의 상황으로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홍길동전> 정도의 줄거리가 대단히 개혁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역사 속의 실재 인물이었던 홍길동이나 임꺽정은 허균보다 좀 앞서 살다간 인물이고, 그 이야기는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임꺽정의 신분으로 볼 때 그가 활약했던 이야기가 훨씬 더 개혁적이지 않았겠는가.
이런 사정을 볼 때 <홍길동전>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을 매혹시켰던 공안파 사상의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 그리고 아무리 잘 읽어도 그저 개인적인 한풀이에 가까운, 엘리트주의적인 영웅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당시(16세기)의 <오륜전전>이나 그것을 언해한 18세기의 <오륜전비언해>와 비교하면 ‘소재만 해도’ 대단히 개혁적이다. 그러나 <홍길동전> 역시 삼강오륜에 철저한 양반 서자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홍길동은 서출이지만 적출인 양반이 되고 싶었고,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출세한다는 이야기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필자는 오늘날 남아 있는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실제로 허균의 작품이라는 증거보다는 아니라는 증거가 더 많다. 허균이라는 인물에게도 흠이 많긴 하지만 마침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필자는 그 사실이 훨씬 더 극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탁오가 그랬듯이 사상은 삶의 완벽한 일관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대략적인 삶의 지향일 따름이다. 그렇게 보면 허균의 삶에서 드러나는 흠보다 그가 생각했던 이상이 무엇인지를 짚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__
이탁오의 초상화. 그는 유교경전이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천년을 내려온 고정관념을 뒤집어 옛사람들의 울분을 토해내고 후세를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남녀평등론'을 주장했다. 남녀가 다르다고 해도 눈으로 보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반유교적인 성향으로 말년에 박해를 받았다. 결국 감옥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
시기적으로 그 당시에 신분차별을 철폐하자는 생각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설사 이탁오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무슨 생각이든 처음이 있는 법이다. 서양의 경우도 프랑스대혁명 이후에 갑자기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메시지가 공식문서에 등장한다. 그 당시 또는 그 이전의 사회상황을 보더라도 그런 생각이 표현된 것은 대단히 갑작스러워 보인다. 이상적이어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생각이 아니면 우리는 한 발 이라도 앞으로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