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중고서점 시리즈] 여행,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Words
1002
Reading
5 min
Listen
Play
8y

image



 5박 6일의 오키나와 여행 일정을 끝내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곳저곳을 다녔던 여행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눈치코치를 뚫고 도착했던, 내 마지막 코스, ‘세상에서 가장 작은 헌책방’ 울랄라 서점이 문을 닫았지만 아쉬움보다는 서점의 간판이라도 직접 보아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마트에서 식사는 못했지만 시식을 잔뜩 해서 배는 고프지 않은 그런 기분이랄까.

 도착은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비행기가 김해공항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의 색에 눈길이 갔다. 눈에 띄게 노란 하늘. 오키나와에서는 한 번도 걱정하지 않은 미세먼지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걸 보니, 날이 춥진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겨울은 다 좋은 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듯 추운 날엔 맑고, 따뜻한 날엔 탁하다. 우리의 겨울을 나타내는 기온의 특징은 삼한사온이 아니라, 삼청사탁(三淸四濁)이라고 바꿔야 할 판이다.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해서 여행에 동행한 친구 가족과 점심을 먹고 집에 가기로 했다. 친구의 아내가 얼큰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해서 공항 근처 식당을 검색해보니, TV에도 소개된 김치찌개 맛집이 있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우린 식당의 주력 메뉴인 김치찌개와 두루치기를 주문했다.

 “오키나와에서 맛있다는 건 다 먹어봤지만, 이 김치찌개와 두루치기가 제일 맛있네!” 질펀한 김치찌개 국물과 양념이 기가 막힌 두루치기를 맛보고 절로 나온 함성이었다.
 “난 오키나와에서 플리퍼 스테이크가 제일 좋았어.” 친구는 다시 오키나와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회상하는 중이었다.

 이제 김치찌개와 두루치기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긴 시간동안 차를 몰아 집으로 갈 일만 남았군, 하고 생각할 때 아내가 제안했다.
 “우리 신세계 백화점 김해점에 가는 거 어때? 거기에 뽀로로 파크가 있잖아. 애들도 좋아할 거야.” 그리고 이어진 두루치기만큼 달콤 짭짤한 제안. “찾아보니까, 중고 서점 김해점이 있어. 거기도 들르고. 오키나와에서 풀지 못한 한을 풀라고.”

 그래, 이번 여행은 김치찌개와 두루치기로 끝날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의 제안에 여행의 피로가 싹 가셨다. 이름 난 맛집의 묵은지 김치찌개가 줄 수 없는 활력이 솟았다.

 저녁까지 김해에서 일정을 보낸 후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분명 아이들은 곯아떨어질 것이다. 모든 게 딱 들어맞는 계획이었다. 우린 식사를 하고 오키나와 여행을 함께 한 친구의 가족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여행의 연장전에 돌입했다.

*

 알라딘 중고서점 김해점은 큰 쇼핑몰 내에 위치해있다. 차에 타자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쇼핑몰에 도착하니 둘째는 잠에서 깼고, 첫째는 계속 잤다. 내실 있게 둘러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되었다. 서점이 쇼핑몰 내에 있다는 구조적인 부분도 호재로 작용했다. 아내가 팔팔한 둘째를 데리고 마트 구경을 갈 수 있었다. 난 첫째를 아기 띠에 매고 서점으로 입장했다. 잠든 아이를 매달고 중고 서점을 활보했다. 미국문학, 일본문학, 최근에 들어온 책들, 에세이. 그리고 김해점에서 처음 본 코너들.



 알라딘 중고 서점은 지점마다 특징적인 코너가 있다. 부산 센텀점에 갔을 땐, ‘인문의 바다’, ‘최상품질 양장본’, ‘#해시태그 추천’ 같은 코너가 있었다. 김해점엔 ‘작가가 번역한 책’, ‘알라디너의 선택(별 넷 이상 책들)’, ‘이 책의 다음 독자에게’ 같은 코너가 있었다. 같은 책이 서점이 두세 권 있을 때, 책들을 다양한 카테고리로 흩어 놓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두 세 권이 뭉쳐 있는 경우엔 왠지 희소성이 없어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같은 책이라도 색다른 주제로 분류되어 있으면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이 책의 다음 독자에게’ 코너에 있는 책에는 책을 판매한 사람이 직접 쓴 손 편지가 들어 있다. 그 책을 사는 사람은 이전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의 간단한 메시지를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책을 팔면서 그런 메시지를 적으면 300원의 적립금을 준다고는 하나, 그 적립금을 받으려고 손 글씨를 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신의 메시지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기분 좋은 의미로 가닿길 바라는 뜻에서 메시지를 작성했을 것이다. 이 이벤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꽤나 감성적이고, 한편으론 여유가 있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나처럼 아이를 매달고 오는 사람은,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내 손에 온’ 헌책에 작은 역사를 부여하는, 중고서점다운 이벤트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손 글씨를 쓸 만큼 내게 의미 있었던 책이라면, 왜 책을 되팔았을까. 어떤 이가 솔직한 마음을 손 글씨로 남긴다면 이런 메모도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저와는 참 안 맞는 책이었어요. 저의 인내심은 다섯 페이지를 넘지 못했지요. 비싸게 산책인데 그냥 냄비 받침으로 쓰긴 아까워서 내놓습니다. 잘 읽어줄 새 주인을 찾길 바랍니다.’

*

 이번 방문의 큰 성과라고 하면 미션 하나를 해결한 것이다. 그간 미션 도서 중 하나였던 <고종석의 문장1>을 이 김해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미리 알아보고 온 것도 아닌데, ‘글쓰기, 독서’ 서가에서 마주쳤다. 2권이나 당당하게 꽂혀 있었다. 평소 그리워하던 사람을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놀라움과 반가움이, 이 책을 그곳에서 마주했을 때 느꼈던 기분과 흡사할 것이다. 지금 아기 띠 속 아이가 깨서, 문 밖으로 돌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돼도 이미 이곳을 방문한 일은 성공이었다.

 이 책이 중고 서점에서 꼭 사고 싶은 미션 도서가 된 것은,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50페이지쯤 읽고 난 후의 일이었다. 글쓰기 강연을 책으로 엮은 내용인데, 다른 글쓰기 책들과는 다르게, 언어학적 지식을 먼저 풀어놓았다. 아, 이건 소장각이다!

 구입하는 책 중에 반 정도는 이미 빌려 읽은 책이다. 다 읽고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책은 중고서점에서 꼭 사야할 미션 도서로 선정된다. 나만의 놀이이자, 게임의 미션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다. 아무리 갖고 싶어도 새 책을 주문하는 간편한 길을 가지 않는다. 게임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한다. <고종석의 문장>은 1년 정도 찾아 헤맨 미션 도서였다. 계획 없이, 우연히 방문한 이 서점에서 1년 동안 진행하던 미션 하나를 해결한 셈이다. 이때 느끼는 기분은 평소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산 즐거움의 수준을 넘어선 성취감이다.

 미션 도서 찾기는 여러 권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미야모토 테루와 폴 오스터의 책들은 늘 미션 도서 목록에 올라있고,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쓴 작가의 다른 책들도 미션 도서로 선정된다. ‘중고 서점 검색기’ 앱에서 그 책들을 수시로 검색하는 건 미션을 되새기는 오랜 습관이다. 전국의 어느 지점에 그 책들이 머물러 있는지 확인한다. 책이 먼 곳에 있을 경우, 여행을 가거나, 그 지역을 방문할 일이 생길 때까지 책들이 그곳에 잘 있어주길 빈다. 꼭 만날 책은 만나게 된다는 말을 되뇌면서 말이다.

*

 중고서점의 서가를 구석구석 훑은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아내와 둘째가 나타났다. 둘째는 나를 보자마자, “아빠!” 하고 달려와서 내 한쪽 다리에 매달렸다. 폭신한 아이의 배가 다리를 감쌌다. 그때까지 첫째는 아기 띠에 매달려 잠을 자고 있었다. 내 손엔 이미 6권의 전리품이 들려 있었다. 미션 도서까지 포함하여 하나 같이 만족도 높은 책들이었다. 둘째가 내 다리를 끌어안고 있던 십여 초의 시간은, 내 다리, 내 가슴, 내 손 모두 내가 사랑하는 대상으로 덮인 순간이었다. 나의 온기를 유지하는 방한복,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갑옷들. 서가 중간에서 난 어떤 무기도 쉽게 뚫을 수 없는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최고의 여행 마무리였다.

 중고서점을 나설 무렵, 첫째가 잠에서 깼다. ‘넌 기억 못하겠지만, 네가 아빠 가슴에 매달려 있는 동안 놀라운 일들이 있었단다.’

 우린 뽀로로 파크로 향했다. 뽀로로 파크에서 남은 에너지를 탈탈 털어 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은 아내의 예상대로 잠이 들었다. 오키나와의 긴 여정이 그제야 끝났음을 실감했다.




[Soul essay] 여행,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image

마나마인로고.gif

[Soul essay-중고서점 시리즈] 여행,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 Ecenc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