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8시 38분. 유저 29번 입장하셨습니다. 전 당신의 조력자 지니입니다. 유저 29번의 미션 수행을 돕습니다. 미션 수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합니다. 정보 제공이 필요하지 않으시면 창을 숨길 수 있습니다.
미션 아이템을 찾는다면, 유저의 레벨은 1만큼 증가합니다.
주의 : 가족 동반 입장은 미션 시간을 단축합니다.
찾을 아이템 : <고종석의 문장 1>
그 외의 아이템을 즉석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휴일 대도시 나들이의 마지막 코스는 8시간동안 가족들의 손과 발이 되어준 아빠를 위한 장소다. 우리 가족은 나의 미션 해결을 위해 알라딘 궁전에 입성했다. 그렇게 알라딘 궁전의 게임은 시작되었다.
알라딘 궁전에는 이미 많은 유저들이 입장해서 저마다의 미션 해결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책장 사이를 거니는 사람들, 넓은 책상에 책을 쌓아놓고 읽는 사람들, 통로를 산책 삼아 걷고 있는 사람들. 다양한 레벨의 유저들이 접속 중이다. 입구 앞 독서 굿즈 진열대를 지나자, 지니가 다시 등장한다.
미션 수행에 끼칠 가족들의 예상 영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내 : 남편의 미션 수행을 도울 조력자입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여정으로 많이 지쳐 있습니다. 아이들의 상태에 따라 미션 수행을 바로 종료 시킬 수도 있는 능력자입니다. 아이들을 건사하기 버거운 지경에 이르면, “아빠~” 하고 경고음을 울립니다. 경고음이 나고 5분 이내에 미션을 종료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 미션은 기대하기 힘들어 집니다.
첫째 딸 : 현재 5살로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를 수 있습니다. 2년 전만 해도 미션 수행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적당한 말로 회유하고 구슬리면 일정한 미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지만 직접 읽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변수입니다.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읽어달라고 유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대한 먼 곳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딸 : 미션을 종료시킬 직접적인 능력은 없지만, 능력자 아내를 움직일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인물입니다. 올해 3살로, 보행 능력을 갖추고 있고 두 개 단어를 연결하여 간단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가장 예측하기 힘든 캐릭터로, 주변 환경이 어떻든지 자신만의 길을 갑니다. 감정이나 신체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추기도 하고 소리를 내며 달리기도 합니다. 알라딘 궁전에 접속한 다른 유저들이 가족을 주목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입장한지 1분이 지나서, 첫째 딸을 알라딘 궁전의 가장 뒤쪽에 위치한 유아 도서 코너로 이끈다. 첫째 딸은 책을 고르기 시작한다. 난 미션 도서가 있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둘째 딸이 탄 자전거를 밀고 들어오는 아내와 마주친다. 아내는 나를 지나쳐 유아 도서 코너로 이동한다. 중고서점 앱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미션 도서는 D86(독서 및 글쓰기 도서 서가)에 위치해 있다.
각종 글쓰기 책이 나열된 가운데서 먼저 발견한 책은, <고종석의 문장 2>이다. 이 책은 지난번에 먼저 획득한 아이템이다. 오늘 미션 도서는 1편이다. <고종석의 문장 2> 옆에 책 한 권이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이는 빈 공간이 보인다. 불길하다. 시작부터 순조롭지 않다. D86, D87 서가를 샅샅이 훑는다. 미션 도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4분이 지났다. 지니의 정보 제공 창이 다시 뜬다.
미션 도서가 서가에 없다면,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다른 유저가 획득한 경우. 앱을 통해 책의 존재를 확인한 이후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2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다른 유저에 빼앗긴 불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경우라면, 이번 미션은 포기하고 추후 미션을 다시 수행할 것을 권장합니다.
둘째, 다른 유저가 뽑아서 읽고 있거나, 읽고 나서 다른 서가에 꽂은 경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해당 유저를 찾아 주변을 맴돌며 그가 책읽기를 마무리하길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싸워서 쟁취할 수도 있습니다. 싸울 때는 책등을 활용을 권장합니다. 이 방법은 유저 상호간에 데미지를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딸을 안고 가서, “이 아이가 그 책을 원합니다.” 라고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법도 있습. (다음 클릭)
셋째, 오늘 들어온 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리 서가를 지정했지만 직원의 착오로 , ‘고객이 방금 놓고 간 책’이나 ‘오늘 들어온 책’ 서가에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션 완수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난 세 번째 상황이라 전제하고 앞쪽 벽면에 위치한 ‘오늘 들어온 책’ 서가로 재빠르게 이동한다. ‘오늘 들어온 책’을 다 보고, ‘고객이 방금 놓고 간 책’ 서가를 둘러볼 즈음, 등 뒤에서 낯익은 발소리가 난다. 꽤 먼 거리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면서 들린다. 둘째 딸이다. “까꿍!”을 외치며 서가 사이를 통과해 내게 달려오고 있다. 아내의 발소리도 둘째 딸 뒤를 따른다.
위협이 감지됩니다.
지니의 경고를 무시하고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집중한다. 문학, 자기계발서, 인문, 경제 관련 책 할 것 없이 모두 훑었지만 미션 도서는 없다. 둘째 딸이 내 다리를 붙잡고 선다.
“아깐 잠이 와서 까물까물하더니, 여기 들어오자마자 다시 살아났어. 완전 흥분해서 까꿍 놀이하고 있어. 얘 좀 데리고 둘러봐.” 아내가 말하고 돌아선다. 귀를 닫을 사이도 없다.
둘째 딸이 나를 올려다보며, “까꿍!” 한다. 그 소리는 가까운 테이블에서 책을 읽던 사람들의 주목을 끈다.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다. 난 아이를 황급히 안고 집게손가락을 펴서 입에 갖다 댄다. 부질없는 행동인줄 알면서도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려달라는 표현을 한다. 내려주었더니, 등을 보이며 반대편 유아 도서서가 쪽으로 걷고 있는 아내를 쫓아간다. 까꿍! 하면서.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잠들기 직전이었던 둘째는 나를 닮은 건지도 모른다. 알라딘 궁전에 들어서는 순간 저렇게 흥분 상태가 된 걸 보면.
얼마간의 시간을 벌었다. 미션 도서는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 서가에도 없다. 난 벽면을 따라 그 옆 서가로 이동한다. ‘역대 베스트’, ‘균일가 2000원 이하 코너’, ‘최상 품질 양장본’, ‘해시태그 추천’ 서가를 차례로 지난다. 미션 도서를 찾을 가능성은 무척 낮아졌다. 이렇게 된 이상, 빈손으로 물러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아이템도 함께 찾기 시작한다.
위협이 감지됩니다.
지니의 경고를 듣고 돌아보니, 첫째 딸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손에 책 한권을 들고 있다. 아내와 둘째 딸이 서가 사이를 휙 지나간다. 아내가 지나가면서 첫째 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짧은 순간 메시지를 남긴다.
“아빠~ 쟤 계속 책 읽어달라고 해. 어떻게 좀 해봐.”
“어, 내가 읽어줄게.” 내 대답은 서가 사이로 사라진 아내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진다.
첫째 딸이 내 앞에 서서 활짝 웃으며 말한다. “이 책 읽어줘.” 글자가 많은 어린이용 책이다. 공룡과 공룡 탐험대가 등장하는 창작 동화다. “그래 알았어. 아빠가 안고 읽어줄게.” 미션 시작 12분. 여기서 미션을 종료한다면 아무 아이템도 건지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미션 도서는 찾지 못하더라도, 다른 아이템 하나는 건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내 심장을 움켜쥔다. 어쨌든 책을 찾아야 한다.
첫째 딸을 번쩍 안았다. 딸은 안겨서 내 가슴팍에 책을 대고 펼친다. “아빠 읽어줘.” 난 곁눈질로 그림을 파악한다. 여러 공룡들이 숲의 공터에 모여 있는 그림이다. 글을 읽을 여력이 없다.
“공룡들이 운동회를 하려고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티라노 사우르스, 브라키오 사우르스, 트리케라톱스…….” 내 눈은 끊임없이 서가를 훑고, 입으론 그림만 보고 아무 말을 쏟아낸다. 공룡들의 운동회라니, 참.
“아빠, 트리케라톱스가 어디 있어? 안 보이는데?”
“어어. 그렇구나. 트리케라톱스는 운동회에 못 왔네.”
그렇게 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아이는 책장을 넘긴다. 아이를 안고 십분 이상을 버텼다. 테이블에서 책을 읽던 한 유저와 우연히 눈을 마주쳤다. 그는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시선을 쉽게 거두지 않는다. 저 멀리서 둘째 딸의 “까꿍, 차자타!” 하는 외침이 귀에 와서 꽂힌다. 게임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 내 손엔 오늘 게임의 완전한 패배를 면할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아이가 읽던 책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게임 접속 신기록 달성! 접속 후 28분경과. 아내가 다가옵니다. 게임 종료가 임박했습니다.
“아빠~” 둘째 딸의 뒤를 따라온 아내가 말한다. “계산하도록 해.” 둘째 딸이 내 다리에 달라붙어 나를 올려다보며 “까꿍!”을 외친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웃는다. 꺄르르르. 난 또 한 번 의미 없이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댄다.
그렇게 게임은 끝났다. 그 길로 나는 가까스로 건진 책 한 권과 첫째 딸이 고른 공룡탐험 책 한 권을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미션 도서 찾기는 실패했지만, 아이템 하나를 얻었으니 완전한 패배는 아니며, 접속 시간 신기록을 세웠다는 것에 애써 만족하며 카드를 긁고 돌아선다. 알라딘 궁전의 문의 자동으로 열린다.
접속이 해제되었습니다. 접속 시간 31분. 미션 도서 찾기 실패. 새로운 아이템 획득. 레벨 향상은 다음 기회에 도전하세요. 저는 당신의 조력자 지(종료 클릭)
/중고서점 시리즈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