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대단지 아파트 입주자 회의에서, 아파트 경비원 94명 모두를 해고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기사가 났다. 해고 이유는 최저 임금 인상에 따른 관리비 부담 때문이라고 한다. 아파트 측에선 용역 업체를 선정하여 업체를 통해 경비원들을 재고용할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해고된 경비원 전원이 재고용되지는 않을 거라는 예측이 많다. 하루아침에 해고 통지서를 받아들게 된,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할아버지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추가 기사들을 보니, 다른 아파트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중 하나라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사람들이 더 분노하는 것 같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결정에서, ‘사람’이 빠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가다간 난방 열사에 이어, 경비원 지키기에 나서는 경비 열사의 탄생도 머지않아 보인다.
이 기사를 보고 있자니, 작년에 우리 아파트에서 벌어진 일이 떠올랐다.
이하 내용은, 작년에 '브런치' 플랫폼에 쓴 글입니다.
어느 날 아파트에 설문조사 안내장이 붙었다. 각 통로 현관 잠금장치 설치에 관한 안내였다. 요즘 새 아파트엔 기본으로 있고, 오래된 아파트도 설치하는 추세라 우리 아파트도 하는구나, 했다. 뭐 시대가 흉흉하다 보니 요샌 작은 원룸 건물에도 죄다 달려있지 않은가.
안내장을 본 건 엘리베이터 벽이었는데 마침 안에는 두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많은 경우, 서로 알지 못하는 둘 이상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자 중독 증세가 나타나곤 한다. 서로의 눈이라도 마주치면 치명적인 전염병이 감염되기라도 하는 듯, 눈을 벽이든 층 숫자판이든, 하다못해 벽에 간 흠집이라도 문자로 읽어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 날도 갑작스러운 문자 중독 발작을 일으켜 대충 본 안내문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궁지에 몰려 필사적으로 읽으면서 아까는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도어록을 설치해야 하는 당위성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는데, 요지는 이렇다. '도어록을 설치하면 관리 비용을 엄청나게 절감할 수 있는데, 그 절감은 경비원의 숫자를 대략 30~40% 정도 줄이는데 기인한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아래엔 경비원 한 사람의 월급으로 들어가는 비용과 매월 절감할 수 있는 세대 당 관리비 현황까지 꼼꼼한 연산 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안내문은 단순한 안내가 아니었다. 그것은 설득을 시도하고 있었다. 일정한 방향으로 설문조사 결과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안내문을 작성한 자가 얼마나 도어록을 설치하고 싶어 하는지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머릿속이 덜커덩거리며 제동을 걸고 싶은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의도만 보였다면 "사람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하면서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도어록이 달린 다른 아파트를 드나들면서 얼마나 부러웠던 걸까, 생각하면서 설문에 동정표를 던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 아파트에 손님이 왔을 때 남들 다 가진 도어록이 없는 게 부끄럽다던가, 정비를 좀 해서 아파트값 좀 올려봅시다! 라고 감정에 호소했다면 좀 받아들이기 쉬웠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가 도어록을 들이기 위해 ‘어떤 논지를 펼쳤는지’, 이다. 경비원 아저씨들의 생계 문제와 사정에 대해 말하진 않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없다. 단지 안내문이 지닌 악의를 밝히고 싶을 뿐이다.
안내문을 작성한 자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자 애쓰면서 이 정도면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을까, 하는 의도를 담아 건조한 숫자로 설득을 시도했다. 주장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논거가 적절해야 한다. 안내문의 논거가 적절한지 살피려면 도어록의 도입과 경비원 퇴출의 상관관계를 밝혀야 한다.
도어록의 역할은 외부인의 출입을 원천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과연 도어록은 경비원이 공식-비공식적으로 하는 일들을 대체할 수 있을까. 도어록이 갑작스러운 도움 요청에 응할 수 있나? 아파트 초중학생들이 생각 없이 버린 쓰레기들을 아침마다 돌면서 치울 수 있나? 제복을 입고 가끔 나타나 인사를 주고받으며 세입자들에게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안정감을 줄 수 있나? 내가 집에 없을 때 택배를 받아줄 수 있나? 외부 주차 차량에 불법주차 딱지를 학생용 풀로 단단히 부착할 수 있나? 잘못한 주차 때문에 차가 못 나갈 때 그 차에 연락하고 주의를 줄 수 있나? 가끔 놀이터에서 마주치는 내 딸에게 손을 흔들어줄 수 있나? 매주 있는 분리수거 날에 쌓인 박스 정리를 해줄 수 있나? 출근할 때 입구에서 경례를 하여 옛 훈련소 시절을 떠올리게 해줄 수 있나?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오해는 마시라. 경비원들이 본 업무 외에 이런 일들을 필수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파트마다 정해진 근로 계약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경비원들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들을 나열해본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도어록은 경비원의 대체제가 될 수 없고, 역할의 교집합도 거의 없다. 따라서 그 논거는 적절하지 않다. 논거가 적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체=관리비용절감'이라는 도식을 교묘하게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군가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적절치 않는 논거를 끌어왔는데, 그 논거가 엉뚱한 희생 내지는 피해자를 낼 수 있는 일이라 악의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관리비용 절감의 원인을 따지지 않고 그저 절감에 혹할 거라는 성급한 판단도 내재해 있다. 따라서 도어록을 설치해야 한다면 경비원의 퇴출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진행해야 맞는 것이고, 설치비가 많이 든다면 그것대로 구성원의 의견에 맡기면 될 일이다.
고층에 사는 나는, 다른 두 명의 문자 중독자들을 배웅한 후에야 집 앞에 다다랐다. 처음 탔을 때와 도어록 설치에 대한 찬반이 뒤바뀐 상태로 말이다. 후에 관리소 직원이 설문지를 들고 우리 집에 나타났을 때 설치 여부를 묻는 칸에 X표를 쳤다. 연필을 꾹 눌러서 하마터면 종이가 찢어질 뻔했다.
이후에 설문 결과는 공지되지 않았다. 치킨 배달부와 택배 기사에게 걱정을 안겨줄 도어록을 들인다는 얘기가 없는 걸로 보아 설치가 무산된 모양이다. 아직도 경비원 아저씨들은 아침에 경례를 하고, 내 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분리수거장에 나타나서 미숙한 분리 수거자에 대해 혀를 끌끌 차며 박스를 정리하신다.
알파고가 세계적인 경비원 백 명과 싸워 이길 미래의 모습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아파트엔 주름 자글거리는 얼굴 위에 모자를 겨우 얹어 쓰신 경비원 아저씨가 오가는 풍경이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