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체험에 참가한 적 있다. 죽음에 대한 강의를 듣고 유서를 쓰고 낭독한 후,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는 체험이다. 사람들은 주로 유서에 후회를 담았다.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그럼에도 남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며 마쳤다. 유서를 읽으며 울고, 그 눈물이 관속에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조금 달랐다. 상실의 슬픔이라는건 어떤 형태로라도 존재하겠지만, 내 삶에 후회가 없고 죽음이 억울하지 않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덜기 위해서 담은 내용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내가 죽음의 순간에 절망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속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진행을 도와주시는 분은 나를 관에서 일으켜 주시며 여태까지 본 참가자 중에 가장 관속에 편하게 누워있었다고 하셨다. 당시에 나는 진정으로 그 어떤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얼마 전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게 옛 기억을 전해주었다. 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냐는 친구에게, 나는 올해만큼 더 살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내가 다시 유서를 쓴다면 유서는 어떤 내용일까. 삶에 대한 미련을 담고, 억울함을 내비치고 있을까?
아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유서를 쓸 수 있거나, 유언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임종체험때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절망하지 않도록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 반면 죽음을 앞두고 내 심정을 표현할 여지가 없다면 한없이 억울하리라. 내가 억울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심정을 남길 수 없으니 남은 사람들은 내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여기리라.
어쩌면 나는 그들의 슬픔을 덜기 위해 미리 유서를 써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마지막에 담담한 심경을 남기고자 하는건 꼭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내 삶에 대한 주관적 평가는 변화할텐데 미리 작성한 유서는 이를 실시간으로 담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매순간 유서를 쓰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시간을 갖지 못했던 아버지의 기일이 다음 주다. 운동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