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와 판타지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상상력이다. 얼핏 보면 좋은 키워드를 지닌 것 같다.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끝도 없이 듣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첫번째로 상상은 종종 망상과 동일시 되곤 하며, 두번째로 이들의 가치를 상상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다. SF와 판타지에서 상상력을 제외하면 글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내 글선생도 SF와 판타지를 싫어하셨던게 아닐까.
SF 거장들을 살펴보면 이는 아주 큰 오해라는걸 알 수 있다. 인공지능 이슈가 커질 때마다 여기저기서 인용되는 로봇의 3원칙은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창조한 개념이다. 로봇의 3원칙의 실효성 내지는 맹점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겠다. 70년도 지난 원칙이 얼마나 정교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SF 작가'의 창조물에 나온 원칙을 현대 사회에서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아이작 아시모프는 대학교수이기도 했으니 공학자가 제시한 개념이라고 해도 좋다. 여전히 그가 SF 작가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아서 클라크는 어떤가? 그의 이름을 딴 클라크 궤도가 있으며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라는 문장은 얼마나 자주 인용되는가. 그들은 충분한 공학적 배경을 지닌 상태로 자신의 상상이 망상이 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율했다.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판타지 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 "판타지니까."라는 변명이 필요한 순간, 그 판타지는 상상에서 망상 내지는 몽상의 영역으로 떠난다. 비단 판타지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그 어떤 창작물에서도 개연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면 현실성을 잃어버린다. 판타지이기에 현실성이 없는게 아니라, 잘 만들어지지 않은 창작물이기에 현실성이 없다. 독자가 작가의 상상의 강줄기를 타고 내려가다 흐름을 잃고 강기슭으로 걸어나와 "판타지니까."라 하는 순간 그 소설은 문학에서 단순한 소비재로 전락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판타지라서 그런게 아니다. "소설이니까."라는 변명도 똑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다. 판타지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언어학 교수였던 톨킨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들은 결코 망상 외에는 재주가 없는 이들이 아니다. 일부 후배들이 판타지와 SF를 가벼이 여겨, 이들을 문학에서 소비재로 몰락시키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나는 그들과 같은 학식을 지니진 못 했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 내가 당당하게 전문가라고 내세울 수 있는 분야는 없다. 흥미에 따라 쌓인 엉성하게 얽힌 다양한 분야의 상식, 그게 내 무기다. 정치도, 경제도, 인간도, 기술도, 심지어 포장을 위한 논리력, 문장력도 없으나 도망은 참 잘 간다.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는걸 늘어놓고,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도망가기', 그게 내 전문분야다. 그래서 오늘도 대책 없이 또 거친 아이디어들을 늘어놓아 본다.
간접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차악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원하는 후보는 아니라도, 이기길 원하지 않는 후보를 막기 위해서 그나마 승산이 있는 후보를 지지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을 자신의 지지에 대한 근거로 활용한다. 때로는 원하는 정책과 원치 않는 정책을 섞어서 내는 후보들도 있다. 나는 그 후보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메세지도 전달하기 어려우며, 전달한다고 정책에 변화를 가져오지도 않는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어느 하나가 없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모두 설득하고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없다면 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나라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두를 휘어잡아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정치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도 참 어렵다. 충분한 정보를 얻기 어려우며, 충분한 도구가 주어지지 않는다. 정보는 돈이며, 도구도 돈이다. 내가 바람직한 사회상을 위해 돈과 영향력을 소모해봐야, 정보와 도구를 제공하는 기업들이 부를 이룰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를 이룬 기업들은 또 다른 사회 문제를 만들어낸다.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은 정보를 독점하고, 더 많은 돈으로 더 좋은 도구를 독점한다. 그렇다고 공익적인 목적이라며 정보와 도구를 공짜로 제공하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돈이 없다면 그들은 정보도, 도구도 제공할 능력을 잃는다. 결국 내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원하는 바를 이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정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시민들은 도전을 멈춘 것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불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을 말하는 이들에게 현실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아마 모든 인류가 그들처럼 생각했다면, 왕정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현실적으로'라는 표현을 혐오한다. 그 표현은 최선을 부정한다. 최선의 가능성조차도 부정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표현이다.
글이 돌고 돌았다. 아주 긴 도입부였다. 결론은 간단하다. 엄밀히 따지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아도 내 한표가 완전히 무가치한 표가 되는건 아니지만, 현대 정치체계에서 현실을 바꿀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49%가 모여도 51%에 눌리는게 야만적인 다수결이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싫어하는 서비스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는 있다. 아니, 계속될 것이다. 대다수가 그에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행동이, 조금이나마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긍정적이다. 현실에서는 "좋은 일 하는건 알겠는데, 현실적으로..."라면 여기에서는 내 의견에 동의한다면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 수와는 관계 없이 "동참하겠다."가 될 수 있다. 다수결에서 밀린다는게 곧 0이 되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굉장히 언밸런스한 글입니다. 머리는 크고 몸통은 없다시피 합니다. 디테일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그냥 기분이 이렇게 마치고 싶은 기분이라 끝냅니다. 제가 기분파에요. 그냥 일기라고 생각해주세요. 내일도 기분따라 걷는 글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