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빅토의 발은 성할 날이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빅토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주로 누구를 불러오라거나 무엇을 갖다 주라는 잔심부름이었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빅토는 작은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녀야 했다. 베누아타스의 저택은 크고 넓었으며 사람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저택에는 라 살레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흑세 땅에 사람들이 처음 정착할 때 지었던 회관이 집터가 되었던 까닭이다. 유래가 그래서인지 집주인의 명성 때문인지 저택에는 하루에도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빅토는 그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저택의 모든 복도와 회랑에 자신의 숨결을 남겼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다녀도 후고를 만나는 운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빅토에게 무섭게 혹은 차갑게 굴었다. 혹독한 일과와 마찬가지로 그런 냉대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빅토는 하루하루가 낯설고 두려웠으나 불평하거나 따질 수 없었다. 엄마와 작은형은 잠잘 때나 볼 수 있었고 대개는 자신이 먼저 곯아떨어져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어디를 가든 옆에서 뒤에서 또 앞에서 자신을 따르던 후고도 더 이상 없었다. 녀석을 꼭 끌어안고 자던 따뜻하고 포근했던 밤도 더는 없었다.
“아기는 언제 나와?”
후고를 빼앗긴 지금 빅토는 언제 나올지 모를 동생만 애타게 기다렸다. 엄마는 침대에 누운 빅토의 까만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보름달이 여덟 번 뜨면 만나게 될 거야.”
“그때 난 빅토스가 되는 거야.”
빅토는 얼른 그날이 와 꿈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동생이 태어나면 같이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 작정이었다. 숨겨진 보물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용의 보금자리를 찾아 탐험에 나설 것이다. 편을 갈라 전쟁놀이도 할 것이다. 자신은 브휘노에 올라타 기병이 되고, 동생은 작으니까 후고에…….
브휘노는 죽었고 후고는 빼앗겼다. 빅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머릿속으로는 자꾸 그런 그림이 그려졌다. 클로투스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일깨워 주었다.
“바보냐?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달릴 수 없어. 달리기는커녕 걷지도 못한다고.”
“내가 가르쳐 줄 거야.”
즐거움으로 가득 찬 미래를 부정당한 빅토는 그렇게 다짐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투스는 심드렁한 투로 동생의 희망에 또다시 날을 세웠다.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아직 모르잖아. 까먹었나 본데, 남자애가 태어나야 네가 빅토스가 될 수 있는 거야. 여자애가 나오면 계속 빅토로 남는 거고.”
“아니야! 동생은 남자애야! 난 빅토스가 될 거고! 우린 맨날 칼싸움하면서 놀 거야!”
“그리고 우린 앞으로 7년 동안 마음대로 놀 수 없어.”
클로투스는 괜히 억지 부리는 동생에게 쐐기를 박았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놀아줄 거야!”
빅토는 그렇게 며칠을 씩씩거렸다. 엄마와 주인마님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 전까지는.
“남편이 아기 이름 지어주고 갔어?”
“아뇨, 마님. 이번에는……. 저도 그이도 이번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그이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는…….”
주인마님은 엄마가 땋아준 머리를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보다 불만족스러운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생각해둔 게 있어?”
“아직 없습니다, 마님.”
엄마가 다시 손을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주인마님은 빨갛게 칠한 입술을 움직였다.
“의원님께 부탁해 봐. 이 집에서 태어날 아이니까 그것도 나름 의미있는 일이겠지. 근데 남자아이 같아, 여자아이 같아?”
“그게 참 묘해요, 마님. 발길질은 별로 없는데 먹는 건 까다롭게 굴지 않거든요.”
“그럼 분명 대범한 여자아이일 거야. 남자애들은 배 속에서도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잖아.”
입구에 서서 주인마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빅토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빅토는 그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넋이 나간 채 돌아다니다가 클로투스가 목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따져 물었다.
“나오기 전까진 모르는 거야. 그런 거로 엄마 힘들게 하면 한 대 맞을 줄 알아.”
돌아온 것은 잔뜩 찌푸린 얼굴과 피로에 찌든 핀잔이었다. 그날 밤 빅토는 작은형 말을 착실히 지키는 대신에 엄마를 졸랐다. 후고가 몹시 보고 싶어졌던 탓이다. 엄마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게 대답이었을지도. 빅토는 더 졸라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 클로투스가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말을 툭 뱉었다.
“차라리 목장에서 일하는 게 어때? 내가 알베흐토 아저씨한테 말해 볼게.”
찔끔 나오던 눈물이 쑥 들어갔다. 빅토는 목장까지 뛰어갈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정말 그래도 돼?”
“그래도 되죠?”
두 형제는 엄마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대답을 꼭 들어야 했다. 용 목장이라니! 클로투스가 말하길 그곳에는 아버지가 탔던 천룡이 있다고 했다. 빅토는 그 용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기병으로서 용에 올라탄 아버지 역시 단 한 번 보지 못했다. 있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을 리 없을 만큼 더 어릴 때의 일이리라. 그러나 빅토는 용을 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붉은 용의 등에 앉아 긴 창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는 천룡 기병들만의 특별한 무구를 갖추고 있다. 갑옷 대신 입은 검은 가죽옷에 앞이 창끝처럼 뾰족한 투구를 쓰고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긴 창을 들었다. 빅토는 종종 클로투스가 아버지의 가죽옷에 기름칠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클로투스는 자기가 그 옷을 물려 입게 될 거라고 했다. 빅토는 그때마다 그럼 투구와 창은 자기가 가질 거라고 우겼다. 클로투스는 그 세 개를 다 갖춰야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거라고 한숨을 쉬면서도 빅토가 투구를 뒤집어쓰는 걸 도와줬다. 투구는 목을 간신히 가눌 정도로 무거웠고 답답했다. 가로로 좁다랗게 난 한 줄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건 숨 막히는 일이었다.
“목장이라…….”
엄마는 뭐가 걸리는지 말끝을 흐렸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구나. 그분이 허락하실 것 같니?”
이번에는 엄마가 클로투스에게 물었다.
“그럼요.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에요. 아버지와 친했다고 하던걸요?”
“그래, 그랬지. 용을 어떻게 다루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너희들 아버지가 몇 번 얘기했었지.”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상념에 젖어있었다.
“그분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된다고 하면 그렇게 하려무나.”
빅토는 환성을 지르고는 이내 잠들었다. 벅차오르는 기쁨은, 아직 모를 일이라는 엄마의 말이 안 들릴 정도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으나 진작부터 밀려온 잠을 이겨내기에는 부족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빅토는 아침부터 분주히 뛰어다녔다. 무겁고 차갑게 느껴지던 집안의 공기는 어느새 산뜻하게 변해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라일락의 달콤한 향기도 느껴졌다. 배시시 웃고 다닌 덕분인지 빅토를 대하는 사람들도 그전처럼 무뚝뚝하고 쌀쌀맞지 않았다. 빅토는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생겼다. 파란 하늘에 솜털 같은 구름이 떠다녔다. 후고와 닮은 구름을 찾아낸 빅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 까만 점 하나가 구름 밑에서 나타났다. 점이 점점 다가올수록 처음에는 들리지 않았던 날갯짓 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이윽고 그 거대한 날갯짓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두 날개가 파란 하늘 위로 검은 형체를 드러냈다. 용은 저택 위로 원을 크게 그리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곧게 편 날개가 하늘과 바람을 갈랐다. 육중한 크기로는 상상하기 힘든 우아한 활강이었다. 빅토는 직감적으로 그 용의 정체를 눈치챘다. 저택과 빅토의 주인, 베누아타스가 수도에 보낸 용이었다. 아버지 다넬라스의 소식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