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쿠스가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방은 빛으로 충만한 상태였다. 창문을 단단히 막은 마름모꼴 무늬의 문살을 뚫고 들어온 햇빛이 썰렁한 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가뜩이나 변변찮은 가구 하나 없는 방의 하얀 벽은 햇빛이 사방팔방 부딪치며 돌아다니기에 알맞았다. 밖은 사람 소리와 새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했다. 모든 게 해가 이미 충분히 떴다는 걸 말해주었다.
“빌어먹을 놈의 방!”
그는 그렇게 소리치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가 잠시 후 욕지거리를 하며 일어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기상이었다.
자쿠스는 능변의 대금업자 니콜루스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었다. 경호원으로 일한 지 벌써 반년 가까이 되었지만, 중심가에 있는 그 저택에서 아침을 맞는 건 드물었다. 그가 일어나는 시각을 아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보통 아침과 점심 사이에 일어났다. 그리고 대개는 매음굴에서였다. 술과 여자로 밤을 보내고 어둑한 방에서 아침을 맞는 게 그가 최고로 여기는 하루의 마무리와 시작이었다. 물론 가장 최악은 자신의 방에서 맞는 밤과 낮이었다. 그것은 여자 없는 밤과 눈부신 아침을 의미했다. 그렇게 일어나면 종일 눈이 쑤시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쿠스는 서둘러 대야에 물을 부어 세수했다. 그는 이것을 첫 번째 세수라고 불렀다. 일어나자마자 씻지 않으면 이 역시 두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곧잘 두통에 시달렸고 그럴 때마다 술과 목욕과 여자로 해결하려 들었는데, 썩 효과는 없었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최근에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자다가 깰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단검으로 관자놀이나 눈을 찔러 머릿속까지 깨끗하게 뚫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항상 베개 밑에 깔아두던 단검을 손닿지 않는 곳에 두고 자기 시작했다.
첫 번째 세수를 마친 자쿠스는 어두운 녹청색 튜닉을 입고, 칼집이 달린 어깨띠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걸쳐 맸다. 갑옷은 입지 않았다. 그는 갑옷을 거추장스럽게 여겨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만 입었다. 다만 단 한 벌뿐인 망토는 잊지 않고 걸쳤다. 수달처럼 촘촘하게 박힌 짧은 털이 달빛 드리운 밤바다처럼 물결치며 자쿠스의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렸다.
그것은 용의 털가죽이었다. 비록 낡아서 윤기가 예전보다 덜했지만 여전히 누구나 탐낼 만한 물건이었다. 용의 기름진 털가죽은 물에 안 젖을뿐더러 불에도 잘 타지 않았다. 가벼운 데다 여간해서는 칼날에 잘리지 않을 정도로 질겨서 병사들이나 위험한 일을 하는 자들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최고로 치는 건 군룡으로 쓰이는 천룡의 털가죽이었는데,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용이 죽었을 때 가죽을 즉시 벗겨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에 딱 밀착돼 딱딱해졌고, 종국에는 바위처럼 굳었다. 이것은 갑옷 재료로 쓰였는데 가공이 어려워 매우 비쌌고, 따라서 귀족이나 장교 이상 정도는 되어야 입을 수 있었다. 문제는 군용 천룡이 죽는 장소는 전장이 유일했고, 죽은 천룡의 털가죽을 그 자리에서 벗겨낼 만큼 전투가 한가롭지 않다는 데 있었다. 자쿠스의 망토는 바로 그 군용 천룡의 털가죽이었다. 누군가 출처를 물으면 그는 늘 내기에서 땄다고 답했다.
햇살이 닿는 곳은 따사롭기 그지없어도 그늘진 곳은 서늘한 날씨였다. 특히 실내는 닭살이 돋을 정도로 한기가 느껴졌다. 자쿠스는 망토 자락을 여미며 계단을 내려갔다. 응접실에 막 발을 디뎠을 때 니콜루스의 동업자인 조세피노도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이제 일어난 건가, 이제 돌아온 건가? 아, 됐네. 뭐가 중요하겠나. 니콜루스의 상태는?”
“아무도 절 깨우러 오지 않은 걸 보니 간밤에 돌아가시진 않은 모양입니다.”
자쿠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어디 가나?”
“아침 먹으러요.”
“아침? 점심이 아니고?”
“일어나서 처음 하는 식사가 곧 아침이죠.”
조세피노가 놀라 물은 게 무안할 정도로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때 서재에서 니콜루스가 소리쳤다.
“거기서 쑥덕거리지들 말고 이리 오라고, 둘 다!”
자쿠스는 투덜거리며 조세피노와 함께 응접실 한가운데, 햇빛이 떨어지는 연못을 돌아 서재로 향했다. 니콜루스는 두 사람이 서재에 들어설 때까지도 안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뭘 그리 보나?”
그렇게 물으며 조세피노가 안뜰을 살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지도 않을 사람을 보겠다고 저러고 계십니다.”
자쿠스가 탁자 위에 놓인 과일바구니에서 사과 한 알을 멋대로 집어 들고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누굴 불렀기에 안 온다는 건가? 뒷문으로 들이려는 걸 보니… 설마 여자?”
“이 사람, 참. 내가 이 와중에 오입질이나 하게 생겼나?”
니콜루스가 붕대 감은 손을 들어 올리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런 때일수록 그거만 한 게 없는데요.”
“그거 봉급에서 깔 거야.”
니콜루스가 자쿠스를 째려보자 그는 거의 뼈다귀가 된 사과를 유리 공예품 다루듯 살포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누굴 좀 불렀어. 베누아타스 집에 들렀다는 의사의 하인.”
“하인을? 의사가 아니고?”
“그 작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안 오고 있으니 말일세!”
니콜루스의 역정에 조세피노는 자쿠스를 쳐다봤다.
“제가 볼 땐 아무도 안 올 거 같지만요.”
자쿠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베누아타스네 동태를 살피고 싶은 건가? 왜?”
“당한 건 갚아줘야 하니까.”
니콜루스는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안뜰을 향해 영원히 붙박아둘 것 같던 시선을 동업자에게로 휙 돌렸다.
“알베흐투스와의 저녁 식사도 무산되고…. 모처럼의 초대였는데! 우리가 그 자리를 만들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나? 그의 눈에 들려고 얼마나 비위를 맞추고 필요한 정보를 물어다 줬는지 생각해보란 말이야.”
“그랬지.”
“게다가 우리가… 아니, 내가 당한 치욕! 그 망할 자식의 손을 잘라도 시원치 않아.”
니콜루스가 구석에 세워둔 칼을 당장이라도 태워버릴 기세로 노려봤다. 그것은 클로투스의 검이었다.
“지금 자네가 잡으려는 게 베누아타스인가 그 꼬마인가?”
“둘 다!”
조세피노가 자쿠스를 쳐다봤다. 자쿠스는 이번에도 어깨만 으쓱거렸다.
사실 자쿠스는 니콜루스의 분노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대금업자의 본분대로 원금과 이자 회수를 완수했다. 손에 입은 화상은 그저 몇 달 고생하면 나을 수준으로, 그 꼬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추측대로라면 그 꼬마는 영영 손을 잃을 게 뻔했다. 자신도 당하면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그 정도면 굳이 손을 더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뭘 어쩌려고? 베누아타스는 대금을 치렀네. 자쿠스가 죽인 용과 자네 치료비까지 후하게 쳐줬어. 그의 명예에 걸맞게.”
“하지만 물건이 제대로 된 곳에 배달되지 못했지.”
“그게 뭐? 알베흐투스가 그 가족을 들이지 못했다고 우리한테 물어내라고 하겠나? 하인이야 언제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데.”
“뭘 모르는군.”
니콜루스가 하얀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그럼 알아듣게 말해 보시게. 자네의 그 달변으로 나는 물론 여기 있는 우리 경호원 나리까지도 알아먹게 설명이란 걸 해 보란 말일세.”
괜히 거론되는 바람에 머쓱해진 자쿠스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니콜루스에게 두 팔을 들어 보였다. 니콜루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손을 휘휘 저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 가족은 알베흐투스가 우리에게 정확히 요구했던 거고, 우린 그 일을 못 했지. 그거 하나로 공들여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졌단 말일세. 그걸 다시 쌓는 데 앞으로 얼마의 비용이 더 들 것 같나? 응?”
“그건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하네만, 지금 자넨 본론에서 내 눈을 돌리고 있군.”
조세피노의 지적은 정확했다. 니콜루스는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그렇지않고는 청산유수를 쏟아내는 기름진 입이 저렇게 굼뜨게 움직이진 않으리라. 자쿠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니콜루스는 투실투실한 배에 올린 깍지낀 손의 엄지를 몇 번 맞대더니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알베흐투스는 그들을 전매할 생각이었네.”
“전매? 왜?”
자쿠스와 조세피노는 니콜루스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그답지 않게 말을 잇는 게 느렸다. 니콜루스는 답하기 힘든 듯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끙 소리를 냈다.
“전매가 뭡니까?”
기다리기가 지루했던 자쿠스가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되파는 걸 말하네. 남은 계약 기간을 다른 집에서 일하게 하는 거지. 최초 계약한 주인에 한 해 딱 한 번 전매가 가능하지.”
말끔하게 면도한 턱을 문지르며 조세피노가 말했다.
“저는 경호원이라 다행이네요.”
니콜루스는 실없는 농담을 뱉은 자쿠스를 흘낏 쳐다보고는 마침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베흐투스는 그들을… 그러니까 죽은 다넬라스의 처와 두 아들을 티볼라스 장군에게 보낼 예정이었네.”
“티볼라스? 11군단장 말인가?”
니콜루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자쿠스는 처음으로 이 사건에 흥미가 생겼다. 11군단은 다넬라스가 소속되었던 군단이고, 그렇다면 그를 처형한 게 바로 티볼라스라는 얘기였다. 묘하게 돌아가는 이야기에 흥미가 동한 건 조세피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가 다그치듯 니콜루스에게 물었다.
“그자가 왜 자기가 처형한 병사의 가족을 원하는 건가?”
“그건 나도 모르네.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빚은 받아야 했던 거고, 알베흐투스댁이 아니더라도 하루빨리 어딘가로 보내지는 게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지.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그저 그 과정에서 알베흐투스… 더 나아가 티볼라스에게도 마음의 빚을 줄 수 있었다는 게지. 그건 실로 엄청난 기회 아니었겠나, 조세피노.”
조세피노는 대체로 수긍한 듯 동업자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래도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듯 턱을 문질렀다.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나에게 안 했나?”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돼야 했네. 아무도 아무런 의혹을 품지 않게.”
조세피노가 마침내 매끈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쿠스는 처음에는 지나쳤지만, 이제는 사뭇 궁금해진 문제를 던졌다.
“근데 말입니다. 다넬라스는 왜 처형된 겁니까?”
“자네 군 경력이 없었던가?”
조세피노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죠.”
“하지만 자넨 시민권자잖아?”
“아버지 덕분이랄까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며 자쿠스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디 마디가 불거진 큼지막한 손으로 나무막대기를 쥐여주던 아버지. 그는 걸음마와 검술을 동시에 익혀야 했다. 전혀 감상적인 추억이 아니었다. 쓴웃음이 절로 나올 뿐. 그때 조세피노의 마른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현재로 돌려놨다.
“그것참 의외로군. 아무튼, 처형될 이유는 많지, 군대에서는…. 탈영한다거나, 명령에 불복종한다거나, 강간, 살인… 부지기수지.”
“상관 살해.”
조세피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니콜루스가 덧붙였다.
“다넬라스가 상관을 죽였다고? 반역죄는 아니라며?”
조세피노가 처진 눈꺼풀을 치켜떴다. 자쿠스는 자기도 모르게 과일바구니에 다시 손을 뻗었다. 흥미로운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달콤한 게 생각났던 것이다. 사과를 비롯한 귀한 과일을 틈틈이 먹을 수 있다는 게 니콜루스 밑에서 일하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정치나 음모, 암투 비슷한 것들에 시큰둥한 사내였으나 어쩐지 이번 일은 들을수록 흥미진진했다. 아마도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들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라고 자쿠스는 생각했다. 니콜루스는 사과를 입으로 가져가는 자쿠스를 곁눈질하다가 눈을 돌렸다.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네. 아마 사고나 실수겠지.”
니콜루스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베누아타스에게 진 빚은 갚아야 해. 우리는 빚을 주는 사람이지 빚을 지는 사람이 아니지 않나.”
“베누아타스를 적으로 돌리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지 의문스럽군.”
자쿠스도 조세피노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아흑세는 공화국에서 수도 크세노빌에 뒤이어 두 번째로 부유한 도시였다. 베누아타스는 바로 그런 도시의 유력 귀족이자 공화국 상원 의원이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눈에 띄는 정치적 활약은 없었으나, 그가 만약 명예를 2순위로 돌리고 본격적으로 야망을 펼친다면 단숨에 공화국 핵심 인사가 될 거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매사가 계산적인 대금업자의 본성에서 벗어난 발상 아닌가 하고 자쿠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니콜루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자는 스스로 만들었든 세간이 만들어 줬든 덫에 걸린 상태야. 명예라는 덫 말일세. 장남이 죽었을 때도 가만있던 자가 대금업자를 상대로 싸운다? 죽은 장남이 저승에서 돌아올 일이지. 게다가 말일세. 그자는 자기 상대가 우리인지도 모를 텐데 뭐가 문제겠나? 응?”
“설마 저보고 싸우라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저는 빼주십시요.”
조세피노가 자쿠스를 흘끗거렸다. 그런데 그를 면박해야 할 니콜루스는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자쿠스가 사장의 의중을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진짜요? 진짜 저를 쓰실 생각입니까?”
“진정해, 이 사람아. 의원 나리를 죽이라는 건 아니니까.”
“그럼요?”
니콜루스의 입꼬리가 투실한 양 볼을 밀어내며 올라갔다.
“나는 그자가 어디까지 명예로울 수 있을지 궁금하다네.”
자쿠스는 노점에서 새 꼬치구이를 사 먹고 목욕장으로 향했다. 하늘은 새털처럼 엷은 구름이 넓게 깔려 연푸른빛으로 맑았다. 햇살이 머리와 어깨 위로 뜨겁게 내리쬐는 반면, 오늘따라 유난히 부는 바람은 차가웠다. 자쿠스는 그런 날씨를 좋아했다. 그는 이질적인 것에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매음굴에서도 운동으로 탄탄하게 몸을 다진 여자들만 찾았다. 살결은 부드러운데 그 밑의 근육은 단단하게 채워진 게 그의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수도에는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팔다리의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단련한 여자들이 흔했지만, 아흑세에선 드물었다. 그래서 그가 찾는 여자들은 손에 꼽을 만큼 한정돼 있었고, 덕분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언젠가는 크세노빌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목욕장은 점심때의 망중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세 개의 온탕마다 예닐곱의 남자들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한쪽에선 뭔가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고, 한쪽은 둘 셋씩 짝을 지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자쿠스는 각자 조용히 여유를 즐기고 있는 나머지 탕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뜨거운 기운이 마치 한기처럼 발끝에서부터 밀려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섰다. 잠시 후 온도에 익숙해지니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만족감이 들었다. 자쿠스는 뜨거운 물을 떠 얼굴에 문지르고, 그다음에는 머리를 적셨다. 그제야 눈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쿠스는 이것을 두 번째 세수라 불렀다.
몸의 피로가 풀어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농가에서 돌아온 뒤부터 매일 아침을 햇빛이 끔찍하게 비치는 그 방에서 일어나야 했다. 니콜루스는 집에 틀어박힌 채 자쿠스까지 붙잡아두었다. 집에는 하인들이 있었고, 개중에 완력을 쓰는 자들도 꽤 있었기에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경호원인 이상 사장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특별한 일정 없이 종일 집에 있는 건 곤욕이었다. 여자를 안아본 지도 까마득히 오래된 것 같아 몽정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오늘 밤 외박을 허락받지 못했다면 니콜루스의 하녀들 중 하나를 꼬셔 볼 작정이었다. 비록 자기 취향은 아니더라도.
자쿠스는 유황 냄새가 섞여 코끝을 찌르는, 습하면서 싸늘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빌어먹을.”
무심코 뱉은 욕에 근처에 있던 남자가 흠칫거렸다.
“아, 이거 실례.”
이번에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니콜루스는 베누아타스를 죽이는 것보다 더 복잡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의원 나리의 유일한 아들, 필리파스의 암살. 그리고 그걸 알베흐투스의 짓인 양 정보를 흘린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알베흐투스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상대할 수는 없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라 살레의 명예로우신 베누아타스 의원 나리?
그것은 니콜루스와 그의 동업자는 물론 자쿠스도 무척 궁금한 대목이었다. 조세피노는 자칫 알베흐투스를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강력한 배후가 돼 줄 가능성이 있는 알베흐투스를 베누아타스가 격파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니콜루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알베흐투스는 티볼라스 장군이 부탁한 은밀한 임무를 완수하지 못 했고, 어쩌면 이미 그 화살을 두 대금업자에게 돌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제 타격이 답이다. 그것이 니콜루스의 결론이었다.
니콜루스는 거절하기 힘든 상여금을 미끼로 자쿠스에게 일을 맡겼다. 그랬다. 그 일을 맡았다. 이제는 장자가 된 필리파스라는 꼬마를 죽이는 일을. 꼬마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니콜루스의 게임에 끼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형극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돈이면 은퇴 자금으로 충분하다……. 자쿠스는 마음에 걸리는 것들은 하나씩 지워내고 즐거운 것들만 떠올리려 애썼다. 상황이 정리된 다음 수도로 거처를 옮길 수 있다. 그것도 몇 년을 아무 일 안 하고 놀고먹을 수 있다. 매일 밤 수도의 여자들과 뒹굴면서…….
도박판을 기웃거리고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매음굴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매춘부들이 다른 사내들에게 선점돼 있었다. 자쿠스가 즐겨 찾던 여자들도 오늘따라 단 한 명도 여유가 없었다. 자쿠스는 아직 한 번도 자 보지 않은 여자와 방을 잡았다. 머리칼이 심하게 곱슬곱슬한 금발의 아가씨로 이름이 자클리야였다. 자쿠스와 같은 어간의 여성형 이름이었다.
“우리에겐 공통점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는 거네요. 나머지도 찾아볼까요, 오늘 밤?”
여자는 목소리만큼이나 모든 게 부드러웠다. 그건 자쿠스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복잡한 그의 머릿속을 하얗게 날리기에는 충분한 밤을 선사했다.
너무 놓아버린 게 문제였다. 자쿠스가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 기척의 주인은 이미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자쿠스는 재빠르게 베개 밑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곧 그 자리에 단검을 놓지 않은 지 꽤 됐다는 사실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동시에 깨달았다.
그때 칼이 날아들었다. 자쿠스는 손에 잡히는 대로 그 앞을 막았다. 항아리가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뜨겁고 비릿한 액체가 얼굴 위로 쏟아졌다. 때는 늦었지만, 그제야 자신이 방패로 쓴 게 자클리야의 머리였다는 걸 알았다. 상대가 자클리야의 머리에서 칼을 뽑을 때 자쿠스는 그를 향해 있는 힘껏 자클리야를 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구석에 놔둔 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칼을 뽑는 동시에 상대의 칼날이 쉭 날아들었다. 자쿠스가 막아내는 족족 상대는 쉴 새 없이 몰아치며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매음굴의 복잡다단한 향냄새는 온데간데없이 방 안은 금세 두 사내가 뿜어내는 체취와 열기, 그리고 자클리야의 피 냄새로 가득했다. 뒤집어쓴 자클리야의 피 때문에 얼굴은 끈적거리고 칼을 쥔 손은 미끄러웠다. 상대가 자쿠스의 손에서 칼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기랄.”
상대는 일각의 틈도 주지 않고 뾰족한 칼끝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자쿠스는 넘어지는 몸을 숙여 칼을 피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무언가를 집어들었다. 이번에는 닥치는대로 잡은 게 아니었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확실한 수단으로 보였던 물건이었다. 상대의 칼이 불쾌한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자쿠스가 팔을 들어 칼날을 막았다. 뼈가 부러질 듯한 묵직한 통증이 그를 휘청이게 했다. 그러나 상대의 칼날은 그의 살을 가르지 못했다. 그가 방패막이로 쓴 게 용의 털가죽으로 된 망토였던 것이다.
자쿠스가 떨어뜨린 검을 잡았을 때, 상대도 그를 향해 마지막 일격이라도 되는 듯 찌르기를 날렸다. 아무리 용의 털가죽이라도 찌르기를 완벽하게 막아낼 수 없었다. 자쿠스는 망토로 상대의 칼날을 감싸 옆으로 밀치고는, 훤히 드러난 상대의 옆구리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상대를 밀어뜨렸다. 그다음에 그가 칼을 꽂은 곳은 상대의 심장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으로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신분을 알아볼 만한 건 없었다. 허름한 튜닉에 갑옷은 입지 않았고, 두건이 달린 모직 망토가 전부였다. 사내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에는 은화 몇 닢이 들어있었다. 그게 자신의 목숨값인지 아니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지, 자쿠스는 알 수 없었다.
자쿠스는 이불보로 대충 피를 닦은 뒤 옷을 입었다. 비명 한 마디 못 내고 죽은 자클리야가 젖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자쿠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쪽 머리를 찌르는 두통이 엄습했다.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니콜루스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근육을 움츠러들게 하는 한기는 차가운 새벽 공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칼을 잡고 싸우기만 한다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를 죽이려는 자가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은 충분히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다. 도박 빚을 지긴 했지만 봉급을 다른 데 쓰지 않으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액수였다. 니콜루스를 경호하며 몇 놈 혼쭐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쓸 정도로 형편이 좋진 않았다. 짚이는 게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기억에서 사라진 중요치 않은 인물이 날리는 비수는 좀처럼 피하기 어려우니까.
다행히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자쿠스는 안뜰과 연결된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응접실과 안뜰 사이에 있는 니콜루스의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여태 자지 않은 건지 너무 일찍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동트기 직전이었다.
자쿠스는 회랑을 지나는 동안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행여 자신의 사장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 경기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저택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그래서 발소리는 벽에 부딪혀 더 크게 울리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제가 습격당한 소식을 벌써 들으신 겁니까?”
자쿠스가 농담조로 말하며 서재로 들어섰다.
“이런 젠장!”
그의 욕은 정말 놀라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니콜루스가 등에 칼이 꽂힌 채 책상에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칼은 손잡이까지 강철로 된, 바로 그 꼬마의 크세나스였다. 니콜루스는 죽어 있었다. 그제야 응접실 곳곳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이 저택의 하인들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뒷문 쪽에서, 그다음에는 현관 쪽에서. 붉은 망토의 물결이 터진 둑의 물줄기처럼 저택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시의 경비대였다.
“제기랄…….”
망토 밑에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V의 날] 1부 1장
[V의 날] 1부 2장
[V의 날] 1부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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