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제본 성애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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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몇 년 전의 일이다. 한 출판사 편집장을 처음 만났을 때다. 이런 저런 얘기 중 그는 다른 출판사의 책을 꺼내고는 이렇게 말했다.

   “뭐하러 쓸데없이 돈을 들여 이렇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책등 부분에 고풍스런 색의 종이를 덧댄 역사책이었다. 그 종이는 한지 내지는 그 느낌을 재현한 종이였다. 그 다음 그는 자신이 펴낸 비슷한 컨셉의 책을 보여 줬다. 그의 책도 한지 느낌 나는 디자인으로 책등 부분이 장식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책은 진짜 종이를 덧댄 게 아니라 그래픽으로 재현된 것이었다. 그 매끈한 책등을 보며 “이렇게 만들면 간단한 것을.”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초면에 그의 출판 철학을 반박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가 비웃은 출판사의 손을 들어 주고 싶었다. 독서라는 행위에 모든 감각적 경험, 즉 시각 / 촉각 / 심지어 후각의 경험까지 포함시키는 개인적 성향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직도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유다. 물론 실용주의적 관점도 이해한다. 한국은 책이 팔리지 않는 나라니까. 그래서 이곳 불란서의 서점에 가는 건 늘 즐겁다. 담배가게보다 안경점이 더 많은 나라답게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책을 고르고, 사고, 심지어 선물한다. 같은 책도 양장본, 반양장, 페이퍼백, 문고본 등 다양한 형태로 나오는 것도 좋다. 페이퍼백이나 문고본을 제외하면 책이 크든 작든 기본적으로 실 제본인 것도 무척 마음에 든다.

   이곳을 포함한 유럽 메이커들의 노트도 실 제본이 기본이다. 수첩이 벌어지지 않게 묶을 수 있는 밴드와 커버 안쪽에 숨겨진 포켓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나는 이곳에 오자마자 즉시 몇몇 브랜드를 애용품 명단에 넣었다. 지금 이 글도 Huginn&Muninn의 노트에 쓰고 있다. 이 외에 몰스킨, Leuchtturm1917이 있다. 크기와 디자인, 질감이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코트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다. 이건 보통 여행용으로 쓰인다. 대문에 쓰인 노트가 그것이다. (사실 이건 몰스킨이 아니라 파브리아노다) 처음엔 여행용으로 A5 크기의 노트를 썼다. 가죽 질감을 재현한 하드 커버에 스타크 가문의 상징이 음각된 것인데, 무겁고 커서 짐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지금은 책상용이나 마실용으로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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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바로 이것. Winter is Coming!



   처음에는 줄지 노트를 선호했는데 지금은 무지 노트로 취향이 바뀐 탓에 가장 아끼는 메이커는 파브리아노다. 이건 밴드와 포켓은 없지만 각각 다른 질감과 색의 종이를 묶은 노트다. 원래 글보다는 그림에 적합한 종류다. 그런데 내 글씨는 글자보다는 그림에 가깝기 때문에 상관없지 않을까 싶다.

   좋아하는 컨텐츠를 입힌 한정판 몰스킨도 아낄 수밖에 없다. 스타워즈, 해리 포터, 스파이더맨... 아까워서 못 쓰겠다. 원래 한정판은 모셔두기 위해 사는 거 아닌가 항변해 본다. 이러다 보니 개봉을 기다리는 노트들이 책장 한쪽을 차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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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아니 이건 좀 많은데...
   +) 참고로 이건 라니스터. 타가리옌과 바라테온도 사고 싶었으나...



   영구불멸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최대한의 영속성을 추구하는, 마치 유럽의 석조 건축물 같은 느낌을 이들에게서 받는다. 가격면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 게 함정이지만.

   이런 풍조가 가격 경쟁력에 밀려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이미 지겹게 봐 왔다. 우리 선조들은 천 년 이상 가는 종이를 만들고, 그 위에 그보다 더 값진 글을 썼지만, 지금 우리는 내일이면 잊힐 전자 정보를 빠르게 소비할 뿐이다.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 없는 만큼, 비교적 느리게 흘러가는 이곳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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