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he writer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그리고 대개는 판타지적인 꿈이다. 지구가 멸망하는 꿈을 세 번 정도, 우주가 멸망하는 꿈도 두 번 정도 꾸었다. 20여년 전, 서쪽 하늘을 가득 메운 목성의 꿈을 꾼 이후부터인 것 같다. 이 꿈은 [별을 본다]의 프롤로그에 영향을 주었다. 주인공이 보고 느낀 것은 내가 꿈에서 보고 느낀 것이다. 용과 소년의 이야기를 꾼 적도 있다. 이 꿈은 [V의 날]이라는 소설로 각색되고 있다. 그 외에 하늘을 난다든지, 뾰족하고 험난한 만년설 첨봉 사이에 세워진 얼음성을 돌아다닌다든지, 배신자로 누명을 쓰고 쫓겨다니는 저항군이 된다든지 하는 온갖 꿈을 꾸었다.
그렇게 이상한 꿈들을 꾸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 자각몽 - 루시드 드림이다. 자각몽은 꿈에서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심지어 그 꿈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걸 말한다. 나는 꿈에서 그게 꿈이란 걸 인식한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꿈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곧바로 다시 꿈속의 나로 돌아가 그것을 잊어 버리거나 잠에서 깨곤 했다. 나의 환상적인 꿈을 조종하고 싶었던 나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각몽 훈련법이라는 걸 찾아서 따라해 보기도 했다. 물론 허사였다.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꿈에서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고 심지어 꿈을 조종하기도 한다는 얘기는 중2병 환자의 허언처럼 들렸다. 남의 꿈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막 내뱉는 거 아냐?
한동안 잊었던 자각몽을 다시 떠올린 건 @coldbeec님의 관련글 덕분이다. 꿈에서 깨었는데 그게 또 꿈이었다... 그런 가위 현상도 자각몽의 일종이라니 나는 생각보다 자각몽을 많이 꾼 셈이었다. 그런 꿈은 몇 번이고 꾸었으니까. coldbeec님은 허언을 하실 분이 아니기에 자각몽에 대한 의구심은 풀렸다. 그럼에도 꿈을 조종하는 건 나에겐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어쩌면 감기약 덕분일 것이다. 두통약이 다 떨어져서 감기약 중 덜 독한 놈을 먹었는데 그게 뒤늦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제 댓글을 달다가 사라진 게 그 때문이다. 정신없이 자다가 깨 보니 방 안의 스탠드가 다 켜져 있었다. 불을 끄고 커튼을 치고 늦은 양치를 하고 다시 누웠다... 여기까지는 현실이다. 죄송. 푹 자다가 다시 자려니 잠이 잘 안 들었다. 억지로 잠을 청했는데 그만 선잠이 든 모양이다. 꿈속의 나는 컴컴한 침실에 누워 있었는데 맞은편 미닫이문 틈새로 거실에 검은 형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거실에는 스탠드가 켜져 있었고 미닫이문은 불투명 유리라 검은 형체의 움직임이 더 잘 보였다. 그건 악령이었다. 꿈속의 나는 그렇게 인식했다. 그때 문틈 사이로 나를 보는 악령과 눈이 마주쳤다. 악령은 검은 덩어리 같은 형체 가운데 눈 하나만 하얗게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나는 미닫이문 바로 앞에 서 있었고 악령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것이 꿈이라고 인식한 게 바로 그 순간이다. 예전 같으면 거기서 끝이었을 텐데 꿈속의 나는 그게 꿈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되내이고는 '이 꿈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밀고 나갔다.
오른손을 위로 들자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악령이 당황하는 사이, 나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곧바로 알았다. 나는 손에서 나온 빛으로 직사각형의 공간-빛의 방을 만들고 그 안으로 순간이동했다. 빛의 방은 영화의 워프 항속처럼 웜홀을 주파 중이었다. 그 안에는 반가운 두 인물이 있었는데 이카리 신지와 아야나미 레이였다. 아니 왜... 둘다 2D도 아니고 3D도 아닌, 그렇다고 실제 사람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두 인물은 나를 보며 놀란 눈치였다. 레이의 눈동자는 원작과 달리 파랑색이었다. 신지는 여전히 좀 띨띨해 보였다. 나는 그게 꿈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러려니 하며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가 스맛폰의 알림음을 듣고 깼다. 보통 잘 때는 방해 금지 모드를 켜 두는데 어제는 정신없이 자서 깜빡했던 것이다. 꿈이 계속 이어졌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다음에도 또 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은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몰라 이곳에 영원히 기록을 남긴다.
결론은 자각몽, 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