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zoya
우리는 네모에서 몇 블록 떨어진 그녀의 집을 향해 인적없는 거리를 걸었다. 택시를 탈까 했지만 선선한 공기가 마음에 들어 소화도 시킬 겸 그냥 걸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내가 사는 곳이 워낙 험한 동네이기에, 그 외의 구역에 대한 경종은 머릿속 아주 먼 곳에서 막연하게 울릴 뿐이었다.
괴한이 불쑥 튀어나온 건 어느 집 담벼락을 따라 걸을 때였다. 그녀는 순간 흠칫 놀라 몸이 굳었고, 나 역시 놀라기는 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괴한에게서 멀찌감치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괴한이 가로등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를 가로막으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괴한은 반쯤 벗겨진 대머리에 말코비치를 닮은 초로의 남자였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낯이 익은 게 아니라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마치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된다는 양 남자는 품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 앞을 어슷하게 가로막고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기괴해 보이기는 했으나 딱히 살기나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권총만 아니라면 무시하고 지나쳐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 덕분인지 먼저 대화를 시도한 건 그녀였다.
“당신을 알아요. 애덤스 씨 맞죠?”
그 순간 내 머릿속에도 그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나보다 앞서 지미의 은총을 받은 그 남자였다. 그런데 대체 그가 왜 우리 앞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딜레마야.”
그녀를 쓱 한번 보고는 내게 다시 시선을 돌린 말코비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뚱딴지같은 말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구요?”
“우리에게는 딜레마가 하나 있지.”
뜻 모를 말에 입을 다물고 있자 말코비치가 덧붙였다.
“너와 나 사이에.”
말코비치가 지칭한 인물은 나였다. 분명 그치와 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미의 신약 덕분에 다시 일어난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말코비치와 나뿐이었다. 그 작자와 내가 소생의 기쁨을 자축하고 공유하는 모임을 하기는커녕 이때까지 대면조차 없었던 걸 생각하면 첫 만남은 퍽 불유쾌한 모양새로 시작된 셈이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혹시 지미와 저를 착각하신 게 아닌가요?”
“아직 모르고 있나 보군.”
“뭘 말입니까?”
말코비치는 이번에도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총구가 내 가슴을 똑바로 겨눈 것이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던 심장이 12기통 엔진처럼 엄청난 양의 혈액을 빠르게 빨아들였다가 내뿜기를 반복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한 딜레마지.”
말코비치는 완전히 미친 것 같았다. 나는 혀가 완전히 굳어 버리기 전에 억지로 말문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도움을 원하신다면…….”
“아, 네가 날 돕는다?”
말코비치가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인연이란 참 묘하지. 너와 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그 앞에 쌓였는지.”
끼어드는 사람이 없자 말코비치는 미치광이답게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했나?”
말코비치가 총구를 옆으로 옮겼다. 어느새 전화를 꺼내 들었던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정해요.”
내가 그녀 앞을 완전히 가로막으며 간청했다. 그녀도 다급하게 자신의 행위를 해명했다.
“경찰에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당신을 도와줄 사람을 부르려던 거예요.”
“짐 말인가?”
냉소적인 말투로 말코비치가 내뱉었다.
“그에게 유감은 없어. 다만 그는 날 믿지 않았지. 이건 그저 간단한 딜레마야.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느냐 마느냐 혹은…….”
한순간에 세상과 나, 아니 그녀와 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차가운 금속이 다시 나를 겨누었다.
“너와 나 둘 중 누가 살인자가 되느냐의…….”
얼어붙은 내게 시선을 고정하던 말코비치가 찰나지만 슬쩍 미소 지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이러는 게 부당한 걸까? 아니지, 그건 잘못된 전제야. 예정된 건 없어. 모두 다 일어났던 일이지. 이 순간도 과거가 될 것이고. 난 새로운 과거를 만들 수도 있겠지. 간단한 일이야. 이 방아쇠만 당긴다면…….”
그 순간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키 작은 건물의 장벽을 타고 넘어 사건이 예정된 장소에 들이닥쳤다. 그건 분명히 이 동병상련의 말코비치를 겨냥한 게 아니었으나 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유모차를 구할 때처럼 앞뒤 따지는 생각을 제치고 몸이 먼저 나섰다. 철컥 소리가 들렸다. 망할 놈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계속
개인 사정으로 잠시 사라집니다.
걱정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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