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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일어나야겠어요.”
그 말이 순식간에 내 가슴을 진공 상태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웨이터가 내 체크카드를 들고 사라지자 그녀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마요.”
나는 그녀의 의도가 행위로 이어지기 전에 재빨리 차단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어도 첫 데이트는 남자가 사는 거죠.”
“그건 고리타분한 생각이에요.”
“뭐 어때요. 전 구식이 좋아요. 좋은 것에 한해서요.”
그녀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지갑을 도로 넣었다. 그때 웨이터가 헛기침하며 다가와 영수증과 함께 볼펜을 내밀었다. 서명하려던 나는 웨이터가 내민 게 영수증이 아니라 사실은 쪽지이며 거기에 쓰인 글이 나를 아연실색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발견했다. 잔액이 부족해 결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명 대신 기다려 달라고 황급히 적고는 웨이터를 올려다보았다. 웨이터는 내게만 보이게 살짝 윙크하고 자리를 떠났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나는 곧장 계산대로 달려갔다. 사려 깊은 웨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웨이터의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베니토, 당신은 제 은인이에요. 문제 해결을 위해 잠깐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베니토는 굳게 다문 입으로 미소 지으며 계산대의 전화기를 집어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내가 아는 이들의 번호는 다 외우고 있었기에 누구에게 전화할지가 유일한 문제였다. 파커 씨는 온라인 뱅킹 따위의 취미는 없으니 당장 도움을 받기란 힘들 터였다. 나는 동네 친구 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돈이 없어 곤란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불길한 상상이 점점 뚜렷해지다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단 세 사람만이 목록에 남은 것이다. 엄마, 지미, 수지 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지미에게 연락해야 했다. 만약 지미와의 통화에서도 진전이 없으면 차라리 파커 씨에게 전화를 걸어 신용을 보증해 달라고 하고 외상으로 달아두는 게 나을 것이다. 이곳은 구식이니까 요즘은 찾기 힘든 과거의 미덕이 남아있으리라. 다행히 지미는 전화를 받았다.
“빌어먹을. 네 도움이 필요해.”
“잠깐 기다려 봐. 실종 신고 낸 거부터 취소하고.”
나는 지미의 시답지 않은 농담을 무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돈 좀 꿔 줘.”
“얼마?”
“음…… 80, 아니 100벅스.”
베니토에게 팁을 후하게 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쳐 말했다.
“센터로 와. 아직 연구실이니까.”
“계좌로 쏴 줘.”
“그건 곤란한데.”
나는 슬슬 밀려오는 짜증을 꾹꾹 누르고 성숙한 인간의 의지를 발휘해 참을성 있게 물었다.
“왜?”
“어…… 난 인터넷 뱅킹이 안 돼.”
“뭐? 그게 말이 돼?”
“돼. 내가 왜 매번 널 직접 만났겠어?”
“생색내려고 그러는 줄 알았지.”
“뭐 그런 이유도 있었지.”
지미가 웃으며 말했다. 어이없지만 거짓말은 아닌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가게 주소를 불러 주고 통화를 끝냈다. 자리로 돌아오니 작은 그릇에 담긴 젤라토가 탁자 위에 있었다. 그녀는 작은 숟갈로 아이스크림을 살살 긁으며 말했다.
“서비스래요.”
베니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산대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베니토는 물론이거니와 이곳을 추천해 준 파커 씨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쫓기던 마음이 넓은 들판에 들어선 듯 여유가 생기자 문득 수지 큐가 생각났다. 이렇게 좋은 곳을 함께 오지 못한 게 아쉽고 미안했다. 수지 큐와는 파커 씨의 표현대로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현대적인 인테리어와 메뉴를 갖춘 퓨전 비스트로, 유명 블로거가 추천한 유명 오너 셰프의 레스토랑, 듣도 보도 못한 색다른 칵테일을 조제하는 라운지 바, 글루텐과 합성물을 쓰지 않는 디저트 카페까지 내로라하는 맛집은 거의 다 섭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앞으로의 내 운신의 폭은 좁아질 터였다. 하지만 설령 이 레스토랑 한군데만 올 수 있다 한들 그녀와 함께라면 늘 새로울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젤라토를 녹이고 있던 눈을 들어 보니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염원을 담은 담백한 말투로 물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같이요.”
그녀는 웃지도 않고 여전히 탐색하듯 커다란 눈으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녀의 볼이 홍조를 띠고 있는 건 착각일까.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그럼 그렇게 해요.”
그녀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게 오히려 나를 조금 불안하게 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공수표를 남발하는 데 개의치 않는 게 아닐까? 그때 차 한 대가 레스토랑 건너 길에 서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거기서 내린 건 지미였다.
“저도 잠시 실례할게요.”
놀라운 타이밍으로 이번에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유로운 척 앉아 있다가 그녀가 화장실 복도로 사라지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활짝 열어둔 아코디언 도어 쪽 자리라 굳이 현관을 이용할 필요도 없이 곧장 밖으로 나가 길을 건널 수 있었다.
“늦었잖아.”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지미가 고개를 들었다. 지미는 변명도 생략하고 곧장 물었다.
“수지 큐랑 왔니?”
“그럴 리 없잖아. 돈은?”
지미는 지갑에서 100달러 두 장을 꺼내며 또 물었다.
“그럼 누구?”
“알 거 없잖아. 얼른 가 버려.”
나는 그중 하나만 취하며 말했다. 지미는 아랑곳없이 내 어깨너머를 기웃거렸다. 나는 지미를 강제로 돌려세우고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못내 아쉬운 듯 뒷걸음질 치는 지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어느덧 그녀가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나를 찾는 듯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베니토가 그녀에게 다가가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지미가 중얼거린 한마디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클레어?”
지미의 읊조림은 정확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