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zoya
“어쩐 일이야?”
“연락할 수단이 없잖아. 직접 보는 거 말곤.”
수지 큐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몇 개의 단계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내 질문의 의미를 이해 못 할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기에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에 이어갈 말이 궁색해지고 말았다. 나와의 관계를 다시 명확히 짚어 주는 건 피차 잔인한 일이다. 수지 큐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대답은 다분히 의도적일 수밖에. 내 표정은 저절로 굳어졌다.
“그렇게 인상 쓸 것까진 없잖아.”
나는 못 들은 척하며 트럭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내 표정 하나하나에 반응할 게 뻔한 그 시선. 그걸 피하고 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파커 씨가 마셨던 잔을 치우며 물었다.
“뭐 마실래?”
이번에 못 들은 척한 건 수지 큐였다.
“그동안 생각해 봤어. 그러니까, 네가 내 옆에 없는 동안.”
나는 애먼 잔을 만지작거리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 말라붙은 커피 거품이 하얀 도자기 안에 한 폭의 현대 미술을 실현하고 있었다. 목성의 줄무늬 같은 그 기묘한 얼룩에 내 기분은 저기압을 향해 침잠하기 시작했다.
“우리 인연이 이것으로 끝일까, 이런 결말을 위해 그동안의 시간들이 필요했던 걸까…… 그런 생각들.”
꽤 길게 이어질 주제였다. 내 생체 시계가 그녀의 등장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었다. 피하면 피할수록 시간만 끌게 될 뿐이다. 나는 수지 큐를 향해 돌아섰다. 오늘따라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살짝 기운 태양과 흑발이 일으킨 착시 효과이리라. 불안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흔들렸다.
“난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그동안 살아온 시간이 널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믿었어. 그건 지금도 그래.”
간절함이 담긴 불안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흔들렸다.
“그런 순간 느껴본 적 없니? 나와 함께 했을 때…….”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폭발할 수 있는 원천이 내재하고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는 아이 입막음을 위해 장난감 쥐여 주듯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아마 있을 것이다. 다만 잊어버렸을 뿐. 기억한다 해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으리라. 그 속에 희망의 암시로 착각할 만한 요소가 하나라도 있다면 수지 큐는 단숨에 찾아낼 테니. 어쨌든 나는 답을 주어야만 했다.
“늘 그랬어. 너와 함께 있을 때 진정 살아있다는 게 실감 났으니까. 하지만,”
나는 헛된 희망이 싹틀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하지만’을 단숨에 붙였다. 하지만 그다음을 이을 적절한 말은 현격한 대비를 이루며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수지 큐는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렸다. 그럴수록 내 입은 더 바싹 타들어 가서 꽉 막힌 발화의 분화구를 굳게 닫았다.
그때 수지 큐의 어깨너머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눈동자는 한순간도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증명하며 즉각 그녀를 포착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내 미세한 움직임은 수지 큐에게 포착당했다. 고양이처럼 예민한 감각이 수지 큐를 뒤돌아보게 했다. 그녀를 본 순간 수지 큐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번에 이해한 것 같았다. 나를 향해 다시 돌아온 수지 큐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금이 간 채 싸늘한 증오를 투과했다. 나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쭙잖은 변명을 시작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내 생각이 중요하긴 하니?”
이글거리는 눈빛이라는 게 무엇인지 수지 큐에게서 처음 알았다. 수지 큐는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돌아서더니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 시작했다. 파괴적인 본능을 자극받은 소행성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나는 그저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 같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수지 큐는 그녀의 곁을 스치듯 지나 시청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무슨 일이에요? 저분 꽤 화나 보이던데.”
커피 트럭이 드리운 그늘 밑으로 들어온 그녀가 내게 물었다.
“약간의 컴플레인이 있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고작 그거였다. 처음부터 전 여자친구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건 얼간이 같은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나 수지 큐에게나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녀가 물었다. 표정과 말투로 보아 큰 기대는 안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애써 감춘 것인지도. 나는 수지 큐를 눈으로 좇았다. 퓨마처럼 층계참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수지 큐……. 그건 내 착각이었다. 수지 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