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he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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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가운데, 그녀가 멈췄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 부신 햇살에 살짝 찡그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마침내 커피 트럭 앞에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무언의 힘이 나를 앞으로 떠밀었다. 그녀의 인력이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당신이군요.”
그녀는 여전히 햇빛에 미간을 찌푸린 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네, 저예요.”
나는 히죽 웃었다. 동시에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은 여전히 귀에 걸려 좀처럼 내려올 줄 몰랐다.
“몸은 좀 어때요? 다친 덴 없어요?”
“다친 덴 없지만 두 번은 못 할 거 같아요. 그쪽으로 전문가가 아니라.”
“맞아요, 그래 보이더라구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아 참, 그 아기 엄마는 어떻게 됐어요?”
“그분은 괜찮아요. 타이밍을 잘 맞췄죠. 조금만 늦었더라면 위험했겠지만…….”
그녀는 만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예요. 아기도 다친 데가 없더라구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아, 그렇잖아도 당신을 찾았어요.”
나는 놀라 물었다.
“그쪽도요?”
그녀는 잠깐 주춤하더니 난감한 미소를 보였다.
“아뇨. 그분이랑 남편분이요. 한번 연락해 보시겠어요? 명함이 있을 텐데…….”
그녀가 가방을 뒤지는 동안 나는 어쩐지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어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사뭇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나는 눈앞에 선명한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에메랄드처럼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또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굉장히 오랫동안 잊고 있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언가가 그녀의 눈동자 너머에 감춰져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어떻게 설명하든 그녀는 물론 나조차 납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에 서 있다가 그렇게 불러 보는 게 취미예요. 제일 예쁜 여자에게 말이죠.”
“진짜요?”
말하고 나니 파커 씨가 경멸하는 양아치들이나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싶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양아치처럼 보였을 내 시선을 피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설마 진짜로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그게 당신이 하는 일이군요. 오늘은 제가 제일 예쁜 여자고?”
그녀의 싱거운 농담에 나는 적잖이 안심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지미처럼 매력적인 미소가 아니라는 게 천추의 한으로 다가왔다.
“저는 저기서 일해요.”
나는 엄지를 치켜들어 등 뒤를 가리켰다.
“괜찮으면 커피 한잔 어때요?”
“아하.”
그녀가 알 것 같다는 뉘앙스로 감탄사를 뱉었다. 문득 금방의 제안이 어떻게 들렸을지 깨달은 나는 서둘러 해명에 들어갔다.
“절대 영업 전략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한잔 사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요?”
미심쩍은 미소로 그녀가 물었다.
“그쪽이 괜찮다면요.”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내용은 ‘고작 그것밖에 못 하냐’ 정도일 것이다. 그에 부합하듯 그녀의 미소는 난감한 뉘앙스로 바뀌어 있었다.
“역시 좀 더 좋은 데로 가는 게 낫겠죠? 마침 퇴근 시간이거든요. 사실 여기 커피 그렇게 맛있진 않아요.”
농반진반으로 공세를 몰아가자 그녀가 확실히 의사를 밝혔다.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지금은 시청에 볼일이 있어서요.”
“기다릴게요.”
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패기를 넘어 무례가 된다. 그녀가 주저하며 말했다.
“오래 걸릴 텐데요.”
옳거니. 나는 확신을 느끼며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서서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추가 근무가 있는 걸 깜빡했군요.”
내 너스레에 그녀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항복 의사였다.
“30분, 어쩌면 그 이상 기다려야 할걸요.”
“제대로 봤군요. 기다리는 게 제 특기죠.”
그녀는 정말 못 당하겠다는 듯 웃었다. 그녀가 웃는 게 좋았다. 그녀를 웃게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 흐뭇함이 내 표정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어색한 듯 충분히 시간을 들여 점차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 이따 봐요.”
“서두를 거 없어요.”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근데, 이름이 뭐라구요?”
그녀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데자뷔가, 데자뷔의 데자뷔가 내 머리를 아찔하게 뒤흔들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며 내 이름을 묻고 내가 그에 대답하는 장면이 내가 맡은 대사를 채 다 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재현되었고,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연이었다. 나는 마치 그렇게 하면 현기증이 물러나기라도 한다는 듯 씩씩하게 소리쳤다.
“잭!”
그녀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다가 건물이 드리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믿을 수 없는 일을 목전에서 보는 건 흔치 않지.”
파커 씨는 우리의 재회를 그렇게 평했다.
운명.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복잡한 인과의 톱니바퀴를 거친 희박한 확률이 만들어 낸 기적. 그러나 우주라는 공간으로 의식을 확장하면 아무리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0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된다. 우주의 관점에서 그건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뿐. 하지만 때로는 그런 장난이 인간의 삶을 압도하는 거대한 느낌표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촘촘한 거미줄로 신경망을 대체했다.
“조심하게. 운명이 장난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파커 씨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서 단번에 이해했다.
“별일 있겠어요?”
내 말은 운명에게 들려주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별일이 있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원래 전前자가 붙는 건 다 무서운 법이거든. 내 전처처럼.”
그 말을 남기고 파커 씨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다는 듯 얼른 자리를 피했다. 나는 흑발을 찰랑거리며 다가온 낯익은 여인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어쩐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