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he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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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띠띠- 띠띠-
나를 깨운 건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 축축한 물이 얼굴을 가로질러 귓가에 맺히는 찝찝한 느낌에 눈이 떠졌다. 꿈에서 느낀 슬픔은 기억이 날아간 자리에 긴 여운으로 남았다. 대체 무슨 꿈을 꾼 걸까? 그녀와 수지 큐가 나온 것 같았다. 수지 큐의 해골 큐피드를 본 것도 같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짙은 안갯속에서 발밑을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건 입안에 감도는 클레어라는 이름뿐. 그녀의 이름일까? 나는 어느덧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또다시 우주의 미아가 되었다. 이런 내 태도가 모순 그 자체임을 나도 안다. 모든 종말의 고리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은 나 자신이 그녀를 찾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게 있어 엄청난 의미를 지닌 그녀 또한 그 고리 중 하나에 불과한데. 그녀뿐인가. 전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와 사회운동가, 빛나는 노벨상의 석학, 수백 년 동안 회자될 위대한 예술가, 국보급 운동선수, 미합중국 대통령,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그 모두가 죽음으로 바스러질 몸뚱이를 갖고 태어났다. 그들의 전설도 결국 최후를 맞을 인류와 지구와 우주와 함께 영영 사라질 것이다. 제아무리 극적인 삶의 주인공이라도, 이를테면 스티브 잡스처럼 656쪽의 흥미진진한 전기로 인생을 채운다 해도 우리는 이름 모를 고인돌의 주인처럼, 혹은 화성에 거주했을지 모를 고대인들처럼 잊힐 것이다. 아니, 잊히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를 잊을 그 누군가도 종국에는 사라질 테니.
사랑 때문일까? 그게 반론의 여지가 없는, 관습적으로 타당한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지미의 말대로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랑도 결국 호르몬 칵테일에 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불과 2년 남짓의 그 짧은 유효기간이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게 하는 게 사랑이라는 짧은 단어에 내포된 필연이라는 것을. 그런 화학 작용의 결과로 내가 그녀에게 끌리고 그녀를 그리워하게 된 거라면 그것은 더욱 모순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나는 계속 그녀에게 그 이상의 무엇을 부여하려고 애썼다. 그녀에 대한 의미 부여가 마치 유한한 존재들에게 무한한 희망이라도 될 수 있는 양, 그녀가 모든 종말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구세주인 양……. 그녀가 눈앞에 없는 동안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과대망상적으로 부풀려졌다. 그녀는 나에게 미지의 우주였고, 그곳에는 비밀의 열쇠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내 친구 중에 사람 찾는 일을 하는 놈이 있는데 소개해 줄까?”
공공 와이파이에 연결된 아이패드로 페이스북을 뒤지고 있을 때 파커 씨가 말했다. Claire에 대한 검색을 끝내고 Clare로 막 시작했을 때였다. 파커씨와 나는 커피 트럭이 드리운 그늘로 나와 쉬는 중이었다.
“아뇨. 사실 이게 맞는 이름인지도 모르는걸요.”
파커 씨가 마디 굵은 손으로 희끗희끗한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 그 친구 일은 찾는 걸로 끝나지 않거든.”
일어날 수도 있었던 참사로부터 아기를 구했을 때 내가 품에 안은 건 내 삶의 주도권이었다. 그때 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삶의 주인이, 또 주연이 누구인지. 그래서 그녀를 뒤쫓지 않았다. 그녀와의 재회는 결국 일어날 일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었던 근거 없는 확신이 그렇게 말했다. 감금에서 풀려나리라는 걸 알았던 것처럼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다시 운명처럼 조우할 날이 오리라고 나는 믿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 조바심이 싹트기 시작하자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 단서도 없이 온종일 망할 SNS를 뒤지며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다. 물론 그건 결코 소득을 볼 수 없는 일이었고, 사실 SNS는 그런 운명적인 발견이 일어나기에 매력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는 게 내가 그린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온라인에서라도 하루빨리 찾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그 여자가 있는 게 확실해?”
파커 씨가 갓 뽑은 커피에 설탕 한 티스푼을 넣으며 물었다.
“아마도요. 페이스북 계정 하나쯤은 기본이니까요.”
“자네는 없잖나. 나도 그렇고.”
정확한 지적이었다. 나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공간 어딘가에 기록을 남기며 자신의 삶을 라이프지에 싣지 못하는 대중의 대리 만족적 행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1분의 통화면 간단히 끝날 용건을 좁아터진 스마트폰으로 씨름하는 것도 몹시 힘들고 고되어 보였다. 그런 점도 수지 큐와의 이별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수지 큐가 늘 목말라했던 그 흔한 연인 간의 달콤한 문자 메시지 따위는 내게선 결코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니까.
“우린 둘 다 구식이니까요.”
나는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파커 씨도 동의했다.
“난 구식이 좋다.”
파커 씨는 커피를 두어 번 홀짝이고는 설탕 한 티스푼을 더 넣고 휘휘 저었다. 나는 그 과정을 차마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설탕 좀 줄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디 굵은 큼직한 손에 캠핑용 컵을 들고 파커 씨가 말했다.
“구식이 좋아.”
스스로 확신을 심으려는 것인지 재차 그렇게 읊조리고 나서 파커 씨는 남은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파커 씨는 여전히 얇디얇은 손잡이를 놓지 않고 근육이 다소 퇴화한 몸과는 대조적인 불룩한 옆구리에 나머지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이 마초적이면서도 묘하게 섬세했고 한편으로는 향수를 자극했다.
파커 씨는 아버지보다 윗세대로 아버지와는 또 다른 구식의 시대를 살아온 남자였다.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그 시대의 관습과 향수에 젖어 살았으리라. 아버지는 막 문을 연 첨단 시대의 문물과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구시대의 유물 또한 좋아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물려준 올드 쉐비와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우리 집 안팎을 장식하는 아버지의 보물들이었다. 첨단의 드센 광풍에 구식 기기들이 쓸려나갈 때 아버지는 오래된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 시대에 향유된 물건에는 그만한 추억이 어려 있음을. 그래서 나는 구식이 좋았고, 구식을 좋아하는 파커 씨가 좋았다.
“그래도 용케 아이패드는 갖고 계시네요.”
옥에 티를 지적하자 파커 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녀딸 얼굴은 봐야 하니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제 할아비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목소리는 어떤지 그 애가 알 리 만무하지.”
“멀리 있나 보죠?”
“아프리카.”
파커 씨는 말없이 먼 데를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상념에 빠진 듯 보였다.
“사랑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온기를 나눌 때 싹트는 게지.”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파커 씨가 먼저 화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얼굴도 한번 못 본 상대와 컴퓨터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데서 무슨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겐지.”
“사장님 시대의 펜팔이랑 비슷한 거죠.”
내가 쉽게 반박하자 파커 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손으로 쓴 편지하고 화면에 타자만 두들기면 되는 게 같다는 겐가? 우리 땐 문장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어. 요즘처럼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것도 말이라고 할 수 있나? 근데 말이지, 사실 나는 그때도 연애편지니 뭐니 하는 건 영 안 맞았어. 왜인 줄 아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여자랑 다른 게 뭔가?”
나는 파커 씨의 중심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파커 씨가 소리쳤다.
“박력!”
파커 씨는 트럭에 기댄 채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훑었다.
“남자가 여자보다 걸음걸이가 큰 이유가 뭔지 아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한걸음에 거리를 좁히라고 조물주가 그렇게 만드신 게지. 여자가 먼저 다가오길 바라지 말고 말이야.”
그 말에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신을 믿지 않는 나조차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정중해야지. 남자가 여자보다 목소리가 굵은 이유가 바로 그거야. 경박하게 낄낄거리며 건들거리는 놈들이 왜 한결같이 양아치 티를 못 벗는지 생각해 봐.”
파커 씨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나도 그런 놈들이 싫었다. 파커 씨는 맨손으로 황소도 때려잡을 굵은 팔뚝에 힘을 꾹 실으며 말을 이었다.
“젊음은 좋은 거야. 패기 넘치는 구애가 욕을 먹지 않는 유일한 시절이거든. 나라면 말일세,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느니 당장 내 눈앞을 지나는 미인에게 말을 걸겠네. 저런 아가씨 정도면 나이 같은 건 잊고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군.”
나는 웃으며 노장의 눈에 포착된 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여자가 눈부신 광채를 뿌리며 시청을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주변의 시공을 뒤트는 강력한 중력이 그녀를 중심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나는 숨 쉬는 것도 까먹고 멍하니 있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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