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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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지난 회차는 본문 아래 링크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변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 틀림없다. 그런 엄마가 이런 유쾌하지 않은 소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지미와 수지 큐도 굳이 그런 소식을 전할 리 없었다. 원래 어른을 속이는 일에는 모두가 합심하는 법이니까. 나는 결국 내 주위의 모두를 떠나보내고 모두로부터 떠나게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고독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 과연 운명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에 대한 올곧은 변명으로 충분할까? 답을 구하는 데에는 어쩌면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우주는 왜 끝없이 넓을까.



   꿈에서 아버지를 본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재료로 각색된 꿈이었던 것 같다. 꿈에서 깼을 때는 으레 그렇듯 모든 게 불분명해지지만 한 가지만은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따뜻한 냄새와 목소리……. 그 물음은 언젠가 아버지가 우리 형제에게 건넸던, 시공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경적이었다. 물론 그때는 너무 어려 결코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던 게 문제지만.

   각종 해독제와 영양제 덕분에 기력을 되찾은 나는 다음 날 점심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센터를 빠져나왔다. 가만히 누워 있는 일은 진저리가 났다. 평생에 걸쳐 할 일을 나는 이미 다 채우고도 남았으니까. 하지만 내 삶은? 일생을 좌지우지할 힘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는데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여전히 내 삶에 이방인으로 남아있는가. 아버지는 인간의 삶을 넘어 거대한 우주를 마주 보고 살았는데 나는 왜 한낱 찰나에 불과한 시공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주저하고 있단 말인가. 내게 결핍된 요소는 단지 목적과 의지뿐인가? 아니다. 나는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삶에 중요한 무언가가 분명 있음에도 나는 그걸 못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건 바로 내 눈앞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눈뜬장님처럼 살고 있다. 그런 내가 삶의 주인이 되기란 아득히 먼일 아닌가.

   그때 그녀와 다시 만난 것이다.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던 그녀의 흐릿했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햇살 같은 머리칼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투명하게 빛났고, 그보다 더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보석 같은 우주를 담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괜찮으냐고. 그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을 내 눈앞에서 재현하듯 그녀는 또 다른 누군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쓰러진 여자에서 유모차로 옮겨갔다. 쓰러진 여자는 아기 엄마였는데 엄마의 손을 떠난 불운한 유모차가 세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방치 속에서 비정한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운명론자들이 보면 손뼉을 치며 좋아할 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사건을 일으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휘한 듯 때마침 언덕 위에서 귀를 때리는 엔진음과 함께 클래식 머스탱 한 대가 나타났다. 차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통과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맹렬하게 달려왔다. 운전자는 사거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유모차를 못 본 게 틀림없었다. 굴곡진 언덕, 검은 아스팔트마저 하얗게 반사하는 한낮의 햇빛, 머스탱 특유의 툭 불거진 보닛과 좁은 시야,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운전하는 겉멋 든 남자의 조합이라면 충분했다. 뒤늦게 사태를 눈치챈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은 운전자의 멍청한 고막을 둥둥 때리는 12기통의 우렁찬 엔진음과 카 오디오에 묻힌 게 분명했다.

   긴박한 상황을 뒤늦게 안 그녀가 아기 엄마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는 더없이 분명하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 순간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 찰나의 찰나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그 순간 그 장소에서 그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의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행동에 대한 자각이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몸을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운전자를 믿어야 할지 유모차를 밀쳐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약물 중독으로 운동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라는 건 무의식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 몸은 어느 순간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다음에는 강물에서 물고기를 퍼 올리는 곰처럼 아기를 한 손으로 낚아채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매캐한 고무 타는 냄새와 함께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길게 늘어지며 그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생각 없이 저질렀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간 차는 땅바닥과 허공에서 몇 번을 더 구른 끝에 신호등에 처박혔다. 일순 주변의 모든 소리가 끊기고 시간의 흐름마저 멈췄다. 순식간에 노화된 머스탱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그 공간에도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간신히 증명할 뿐이었다.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엉거주춤 모로 누운 채 아기를 들어 살펴보니 다친 데는 없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내 쪽으로, 또 머스탱 쪽으로 몰려들었다. 중년 부인이 아기를 받아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낙법을 구사한 꼴이 되어서 팔과 등이 욱신거리는 정도에 그쳤다. 가죽점퍼가 좀 긁히긴 했는데 덕분에 찰과상조차 입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머스탱 운전자 역시 목숨을 위협받을 만큼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를 끌어내 가로수 그늘에 눕혔다. 그는 머리에 피를 조금 흘리고 정신이 혼미해 보였지만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행인이나 다른 차들도 피해가 없었다. 어디선가 달려온 경찰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상황을 통제했다. 몇몇 사람들, 특히 아저씨들이 내 어깨를 토닥이며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칭찬했다. 나는 가벼운 데자뷔를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기 엄마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 덕분에 그녀의 얼굴을 온전히 보기란 불가능했다. 아기 엄마는 구급차가 올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먼저 도착한 구급차에 아기 엄마와 함께 그녀가 탈 때까지 나는 그녀와 눈 한번 마주칠 수 없었다. 그러다 딱 한 번, 구급차의 문이 닫히기 직전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우리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순간 내 속에서는 온 우주가 지구의 지각 변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로 요동치며 나를 지탱하는 모든 걸 뒤흔들었다. 우주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거대한 운명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떠나는 구급차를 뒤쫓지 않았다. 그녀와 다시 만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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