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he writer
“넌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어.”
수지 큐의 집에서 늦은 아침, 또는 이른 점심을 먹을 때 수지 큐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나는 고지방 우유에 살짝 불린 시리얼을 한 숟갈 뜨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마저 말했다.
“날 사랑한다는 말.”
“내가 안 했다구? 설마.”
“안 했다니까.”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시리얼 한 숟갈을 크게 퍼먹었다. 마치 자신은 이 주제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 듯. 그다음 그런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려는 듯 입안 가득한 시리얼을 우물거리며 지나가는 투로 덧붙였다.
“사랑하지 않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즉각 반박했다.
“그럼 지금 한번 해 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녀는 나를 보던 시선을 그릇으로 옮겼다. 애꿎은 시리얼만 뒤섞으며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은 체념에 가까웠다.
“역시 그런 거였네.”
나는 또 한 번 즉각 반박했다.
“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너한테 뭘 강요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냥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녀는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나는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불명확한 개념을 재빨리 끄집어냈다.
“들어 봐. 일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다음에 이어질 말이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알러지가 있어.”
“오, 그러셔?”
내 의도가 통하지 않은 듯 그녀가 성급하게 비꼬았다. 가뜩이나 한 번도 구체화하지 않았던 생각을 정리하느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녀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난 말이야…….”
말문이 막혔다.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게 명확해지며 마침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난 그 말이 낡았다고 생각해.”
“낡았다고?”
“낡았다기보다는 닳고 닳았다고 해야 하나. 그 말이 만들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쉽게 써왔잖아.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썼다구. 그런 말로 너에 대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솔직히 그게 적절한 말인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말들이 우리 생각이나 기분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거든. 아니 어쩌면 우리는 지금 쓰고 있는 말에 갇혀 있는 걸지도 몰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생각만 할 수 있는 거지. 난 그런 말들에 널 가두고 싶지 않아.”
그것은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려는 수작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지닌 위상이 몹시 거슬리기 시작했다. 연인과 연인, 부모와 자식, 유명인과 팬 사이에서 쉽게 오고 가는 그 말이 함의에 비해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표현 아래 연인은 서로를 구속하고, 부모는 자식을 통제하고, 유명인은 돈을 번다. 사랑이 그들 사이에서 손쉬운 강요나 면피를 위한 도구로 탈바꿈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가운데 애초에 내포된 광기의 구실이라는 역할까지 더해진다면, 그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거북한 이면을 지니게 된다. 그 어떤 멍청하고 그른 짓에도 사랑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그 사람은 최소한 자신의 도덕적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나 자신, 내 가족, 내 나라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심각한 이기심과 광기를 사람들에게 불어넣었던가.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만 일어나는 것 같진 않다.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신들이 저지른 학살에 관한 기록이 그들을 위한 경전에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런 고전적인 이면은 차치하더라도 현대에 와서 사랑이 흔하디흔한 소비재가 되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개나 소나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써 버릴 수 있는 지금, 쉽게 입 밖에 꺼내기 힘들었던 시절에 비해 사랑이 여전히 그 고귀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랑은 이제 청바지에 티셔츠만큼이나 가벼운 모습으로 전락해 버렸다. 표현의 자유를 얻은 대신 본연의 가치를 잃은 것이 지금의 사랑이다. 그런데 내가 어찌 그런 말을 그녀에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낡고 닳은 말을.
“그러니까 어찌 됐든 결론은 내게 사랑한단 말을 해 주기 싫다는 거지? 내가 원한다 해도.”
“해 주기 싫다는 게 아니라…….”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네가 날 진정 사랑한다면 누가 굳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나왔을 거야.”
그녀가 먼저 우울하게 말했다. 불편한 침묵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렀다. 시리얼을 뒤적거리는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 소리가 완전히 멈추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내가 지금껏 해온 모든 건 오직 하나를 의미할 뿐이야. 널 사랑한다는 거.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에 딱 하나를 못 할 뿐인데…….”
“때론 그 하나가 가장 중요할 수도 있어.”
연인들은 사소한 일로 헤어진다. 지미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수지 큐와 나는 각자의 생각에 함몰되어 그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이후 비슷한 주제로, 혹은 전혀 다른 주제로 우리 사이에 의견 차이가 나타났다. 제아무리 단단한 구조물도 계속되는 진동에는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가벼운 진동일지라도. 대화는 양쪽의 간극을 줄이는 게 아닌 서로의 견해가 다름을 선명하게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녀와 나는 계속되는 가벼운 흔들림을 메워 줄 다른 무엇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너는 나를 왜 사랑해?”
그것은 내가 던진 물음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그 의문을 당사자의 입을 통해 들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몰라서 물어? 그냥 네가 너라서 사랑하는 거야.”
“나는 내가 나라서,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의 나르시시스트가 아니야. 난 그런 사람들을 경멸해. 자기 자신이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좀 더 노력할 생각은 안 하고, 있는 그대로만 가지고 사랑받길 원하는 사람들, 자신의 존재가 곧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 나는 그들과 달라.”
“넌 항상 이유를 찾으려 하지. 태어난 이유, 깨어난 이유, 사는 이유……. 그리고 이제 사랑에서도 이유를 찾는구나.”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수지 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넌 그 이유를 절대 못 찾을 거야. 앞으로도 지금과 같다면…….”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었다. 카페의 탁자에 반사된 햇빛에 안드로메다 같은 눈동자가 투명하게 물들었다. 잠시 후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더없이 확고한 결론을 찾은 상태였다.
“나랑 헤어지길 원하는 거지?”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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