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he writer
그날 낮에는 각종 여가 활동이, 밤에는 퀴즈 게임과 마무리 행사 일정이 잡혀 있었다. 수지 큐는 다른 여자들과 쇼핑하러 간다고 해서 나는 전날 그랬듯 해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이미 익숙해진 바람과 파도와 풍경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진 못했으나 긴장을 완화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지미를 좋아한 수지 큐, 수지 큐를 거부한 지미, 나와 사귀는 수지 큐, 수지 큐와 사귀는 나……. 나는 그녀를 사랑하나? 어차피 사랑은 호르몬 작용에 불과한데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번뇌에 사로잡힌 채 어느덧 다리에 이르렀다. 수평선을 향해 바다 위로 뻗은, 다소 엉성해 보이는 높다란 다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아래서 다리를 올려다보았다. 난간에 기대 셀피를 찍는 사람들, 다리 끝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하는 사람들, 거기서 나오는 사람들……. 그러다 한 여자의 상이 내 수정체를 관통했다. 수많은 사람 틈에서 그녀는 초신성처럼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내 앞에 드러냈다. 그녀는 멀리 한 점에 불과했으나 나는 단숨에 그녀의 인력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녀가 내 망막에 맺힌 건 찰나였으나 그 기억이 영원하리라는 걸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신기루처럼 사라질 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정신없이 달려 다리 위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그 순간 내 유일한 목적이었던 그녀는 없고 그녀의 부재만이 있었다. 혈관을 타고 맥동하는 현기증을 느끼며 이성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했다. 왜 나는 그녀를 쫓았을까? 적절한 답을 찾기도 전에 알 수 없는 슬픔이 현기증에 더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데 뭉쳐 물속에 있는 듯 먹먹하게 들려왔다. 뜨겁게 달궈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기도를 통해 허파로 들어갈 때마다 지옥의 숨결을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태양이 쏟아내는 따가운 빛은 무방비 상태의 두 눈을 직격했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무관심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몸을 숙여 나를 살피는 그 모습에 빌어먹을 태양은 빛을 잃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 얼굴, 그 목소리……. 태양보다 더 빛나는 그녀.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알고 있음을. 다시 눈을 뜰 때 그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눈부신 석양을 뒤로 한 채 신기루처럼 어렴풋이 서 있었다. 나를 향해 돌아본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걸까. 어디에 있는 걸까. 고개를 돌리니 수지 큐와 지미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실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낸 부스럭 소리가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좀 어때?”
수지 큐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곧이어 지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불분명한 설명을 했다.
“걱정할 거 없어. 일사병이야.”
나는 약간 멍한 상태로 뭔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꿈은 그게 한때 존재했다는 느낌만 남아 있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무언가는 그렇게 해야 했다는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기억해야만 한다는 기억에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짧은 여행에서 나는 그곳에 내 전부를 두고 온 것처럼 공허함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다음부터 나는 자주 가벼운 열병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다리 위의 그녀가 꿈에 나타나곤 했다. 사춘기 소녀의 망상처럼 나는 그녀에 대해 매번 다른 상황을 꿈꿨다. 그러나 매번 꿈에서 깰 때마다 그런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고만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내 삶은 결핍으로 가득 찼다. 뭔가가 되려는 욕망은 뿌리까지 시들해졌다. 수지 큐를 향한 열정도 식어 버렸다. 삶의 무의미함이 감금되어 있을 때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누가 보더라도 알맹이가 빠져나간 사람이 되어 갔다. 내 하루하루는 살아가는 게 아닌 살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공지
여러분의 협조로 댓글 살롱을 순조롭게 오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오신 분은 17회 꼬릿말을 참고 바랍니다)
그럴 일을 없을 것 같지만 댓글이 길어지는 경우를 대비해 오늘부터 별도의 공간을 하나 더 두겠습니다. 알아서 편하게 잘 이용해 주시면 됩니다.
또 별도로 끽연실을 하나 엽니다. 이곳은 트위터처럼 제가 뻘글을 남기는 용도로 쓸 겁니다.
오늘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