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새벽 5시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쓰던 소설을 좀 더 썼다. 어제 오늘 합쳐서 천단어 쯤 되니까,
평소 이틀에 한 번, 천이백 단어 쓰던 컨디션에 좀 더 가까워 진 것 같다.
여행을 다녀오고 피로가 덜 풀려서이기도 하고, 원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새로 쓰다보니 좀 늦다.
낮에는 홍준기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읽었다. 몇 주 전에 빌려 두었던 책이지만 이제서야 읽는다. 흥미로운 비판이 많고 상당부분 동의하고 있다.
21일은 하루종일 집에서 더위를 피했다. 밤에는 더워서 못 자고 낮에는 피곤해서 억지로 잤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녁 10시였다. 그때부터 책을 읽고 다시 글을 썼다. 다행히 22일은 비가 와 주어서 다소 시원했다. 나는 읽던 책과 노트북을 챙겨서 대학교 옆 카페에 갔다. 여자친구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 반갑게 만날 수 있도록.
날씨가 좋아서 오랜만에 산책했다. 바람이 시원했다. 겨우 20분 퍼부은 비가 이렇게 사람들 불쾌지수를 날려줄 만한 힘이 있어. 여자친구는 뭐? 비가 왔었나? 몰랐어. 하고 말았다. 우리는 걷다가 자주 가는 동대구 시장 치킨점빵으로 들어갔다.
아, 여자친구는 충북 사람이다. 충청도 사람이 의뭉스럽다고 경상도 어른들은 가끔 욕 비슷하게 말하는 데, 정말 내 여자친구는 자기 본심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귀엽다. 산책을 하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하고 물었을 때, 계속해서 모른다고, 그냥 걷는다고 했다. 늘 그런식이다. 사실 어디론가 날 데려가고 있으면서도. 나는 모른채 여자친구 하나만 믿고 같이 가는 거다. 역설적으로, 그게 내가 여자친구에게 믿음을 주는 방법이 되더라.
치킨점빵 앞에서 여자친구가 나를 가게로 끌고 들어갔다. 가게 주인 아주머니가 정말 밝다. 에너지가 넘치고,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분이다. 고든렘지가 식당 살리는 프로그램에 나온 흑인 아주머니 마마셰리보다 더 밝다. 아따맘마의 아리 엄마 실사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아주머니는 내 여자친구를 좋아하신다. 자주 가서 늘 현금 결제를, 현금이 없으면 계좌이체를 하기 때문에. 카드 계산을 하지 않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분까지 미안해하며 신경을 쓰는 게 고마워서 일 거다. 그러다보니 같이 가면 늘 간식을 더 받는다. 어떤 때는 부추전, 어떨 때는 아이스크림. 오늘은 감자튀김 포장을 부탁드렸는데, 치즈스틱까지 같이 들어있었다.
언제 한 번 빵이라도 사들고 가야겠다. 여자친구랑 같이 다니면 이런 일이 많다.
여자친구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싼 것을 좋아하고 돈 욕심이 없다. 중요한 건 돈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인정이 좀 많은 편이고, 한 번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으면 아예 정을 붙인다. 어느날엔 이런 말을 했다. 경북대 쪽문 종이밥 가게 알바생들이 고생을 하는 거 같아. 그러더니 간식을 사갔단다. 그 뒤로 그 가게에 가면 우동국물이 서비스로 나온다.
그 옆옆 가게, 세계지도라고 하는 가게도 자주 가다보니 사장이 알고 무언가 더 주는 것 같다.
같이 가는 카페에서도 여자친구를 알아보고 알아서 사이즈 업을 해준다.
여자친구 덕을 많이 보는 편이다. 일회성 소비에 상처받은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에겐 단비같은 손님이랄까.
대책없는 인간적 접근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다. 가끔 그 점이 곤란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곤란하지 않을 직업을 가지면 그만인거다.
아무튼 여자친구와 감자튀김과 편의점 세계맥주를 사들고 여자친구 자취방으로 갔다. 자취방이 아주 넓은 편이라서 넉넉하게 앉아 컴퓨터로 알쓸신잡 재방송을 보았다. 여자친구도 나도 유시민을 좋아한다. 김영하 이야기를 사이사이 내가 하지만 여자친구는 소설을 몰라서 소설가에 큰 관심이 없다.
한가지 관심 가진 김영하에 대한 일화가 있다. 김영하와 비슷한 이름의, 비슷한 또래의 소설가 김연수와 김영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들은 이야기라 사실확인은 할 수 없지만, 내가 서울에서 소설 합평 모임을 할 때 들은 이야기다. 김영하와 김연수는 서로 아무런 교류가 없는데, 바로 김연수가 김영하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김연수의 첫사랑이 현재 김영하의 부인이라는 이야기였다. 현직 작가의 말이었으니 내가 더 어떻게 확인할 길은 없겠고.. 재밌어서 여자친구에게 이야기해줬다. 여자친구는 그 뒤로 김영하를 나쁘게 본다. 실제로 뺏은 건지 질서지키고 만난 것인지는 여자친구에게 중요하지가 않다...
그렇게 알쓸신잡을 보고 나는 소설을 마저 만들어나갔다. 현재 바깥으로 드러나는 내 직업은 대학원생. 그러나 2012년 아브락사스를 시작으로 여태까지 가끔 익명의 문예지들에 본명이나 가명으로 단편 소설을 내며 살았다. 그렇게 용돈을 벌면 정말 기분이 조크든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발표매체가 좀 바뀌고 분량이 바뀔 수는 있어도.
어떤 아픔과 사정 때문에 오랫동안 못 썼었다. 이제서야 다시 쓰고 있다. 보람이 있다. 살아있는 느낌이 들고.
요즘은 소설을 쓰는 것으로 내 존재가치를 하루하루 지켜나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잠을 미루고 이어 쓰게 된다.
쓰고나서 다음 날 보면 참 별 이야기가 아닌데, 그거 쓰는 게 정말 재밌다. 괴롭지도 않고 피하고 싶지도 않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은 있으나 무리하고 싶지도 않다. 어제처럼 원고를 잃어버리면 좀 당황스럽지만,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도 엄청난 명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소설이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이 대단하고, 모든것을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 중에 거의 다 미쳤거나 원래가 미친사람이라 주변 사람에게 반드시 피해를 준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싶은 생각은 없다.
소설이 대단한 것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쓰다보면 대단히 잘 쓸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잘 쓰는 사람이 쓴 소설은 대단할 수 있다.
정말 대단한 건 문자와 종이와 인터넷 같은 것.. 나의 하루를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이 도구들이 더 대단하다.
꾸준히 쓰다보면 체력이 생기고 요령이 다시 좀 붙을 거고, 원썬 마냥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도 좀 부려볼 것 같다.
이제 자러 가야겠다. 나는 오늘의 존재가치를 지킨 것 같다. 내일도 지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