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현 구마노초(熊野町)는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일본을 대표하는 붓 생산지로, 일본 국내 붓 생산량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하다. 처음부터 붓을 만드는 마을이었던 것은 아니다. 농한기에 시작한 작은 부업이 오랜 세월을 거쳐 지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성장했다.
구마노 붓의 역사는 에도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사일이 한가한 계절이면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일을 하러 나갔다. 나라의 요시노와 와카야마의 기슈 등지에서 붓과 먹을 사 와 판매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교류를 통해 붓 제작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후 장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붓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구마노에 붓 제작이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방문한 곳은 1907년에 창업한 붓 제조업체 분코도(文宏堂)였다. 전시 공간에는 창업자 미무라 구타로(三村久太郎)의 사진과 함께 회사의 역사가 소개되어 있었다. 안내문에 따르면 분코도는 여러 세대에 걸쳐 기술을 다듬어 왔으며, 숙련된 장인들이 붓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전시된 붓은 용도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다양했다. 서예용 붓뿐 아니라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붓 등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붓은 단순히 털을 손잡이에 붙이면 완성되는 물건이 아니다. 털의 특성과 길이를 고려해 고르고, 가지런히 모아 형태를 잡는 등 세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작은 도구 하나에도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이 담겨 있는 셈이다.
구마노 붓이 흥미로운 점은 이 지역이 특별한 원료 산지여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술과 분업을 바탕으로 붓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농한기의 부업으로 시작한 일이 전문적인 기술이 되었고, 세대를 거치며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공예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붓을 사용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학교에서의 서예 교육뿐 아니라 미술용 붓과 화장용 브러시 등으로 생산 분야가 넓어졌다.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수요를 받아들인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붓 만들기. 분코도의 전시를 보고 나니 일본 제일의 붓 산지라는 이름 뒤에는 단순한 생산량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일이 없는 계절에 시작한 일이 수많은 장인의 기술로 이어지고, 오늘날까지 마을의 이름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