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썼던 나의 글 [2]
인간이라는 형태는 다른‘존재’와의 소통을 위한 모습일 뿐이다.
우리 모두 즉 ‘존재’들은 지구라는 곳을 통해 만남의 장을 열었다.
이곳은 초기에 인간으로서가 아닌 ‘존재’로서 다른 ‘존재’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만남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즉 우리는 어떠한 ‘존재’들이고 이러한 ‘존재’들이 다른 ‘존재’와의 교류를 위해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존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일까?
여기에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각자 다른‘존재’였지만 만남을 위해 인간의 형태라는 동질성을 띠게 되었고 이 때문에 우리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동질성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존재’로서만 있었던 우리들은 다른 무엇인가 와의 교류와 소통을 매우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었고 인간이라는 형태에서 느낄 수 있는 각종 감각들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우리 ‘존재’들은 자신의 본래의 형상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종시에는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들은 ‘존재’로서의 본질을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형태를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나는 이러한 궁금증에 현재의 인간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본래 인간의 형태를 띠게 된 이유는 다른 ‘존재’와 소통과 교류를 통한 특정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교류를 통한 특정한 만족감을 나는 ‘형상 유지의 가능성’이라고 정의해 볼 것이다.
줄여서 ‘형유가성’이라고 해보자 아무튼 이 ‘형유가성’이 목적인 우리들 ‘존재’들은 현재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한계는 바로 ‘존재’로서 지니고 있던 본질의 잔여의 차이 즉 ‘생각’의 차이였다.
‘존재’들은 인간이라는 형태를 통해 동질성을 확보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생각의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본래 ‘존재’는 하나의 세상 그 자체였고 이 때문에 ‘존재’로서 가지고 있던 세상의 파편 즉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한 세상이 모두 다르게 되었다.
어떤 인간은 이런 세상을 즉 이런 생각을 어떤 인간은 저런 세상을 즉 저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초기의 ‘존재’들은 다시 형태를 바꾸어 인간에서 ‘존재’로 변하였고 보다 완벽한 소통과 교류의 장을 만들기 위해 지구라는 곳을 가장 공통되고 보편적인 곳으로 세상을 봉인시킨 상태로 모두 지구에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존재’로서의 자신을 잊어버리고(봉인하고) 지구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존재’로서의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간’이 되어버린 ‘존재’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완벽한 세상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존재’는 ‘인간’으로서 완벽을 꿈꾸었지만 결코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