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입니다
세월을 세어보면 20년전에 알게된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20여년전 일본인 모임에 초대되어 참석을 했던곳에서 한 일본인 언니를 알게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야시마 가즈꼬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라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고 일본으로 제가 떠날때까지 연락을 하며 지내다가
그후에도 가끔 소식을 전하는 언니입니다
가즈꼬 언니가 효부상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되고 역시나 내가 알고있는 그녀라면 받을만 하다고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서로의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국으로 시집온 가즈꼬 언니는 결혼 첫날부터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와 연로한 시아버지를 지성으로 봉양하여
주위분들의 추천으로 효부상을 받게됩니다
지체장애 2급으로 하반신 불구인 시어머니를 등에 업고 병원을 전전하며
병수발을 들었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느라 고향한번 마음놓고 가보지 못한 그녀는 마땅히 해야할 도리를 했다며 상받은 것을 오히려 민망해 했습니다
결혼 당시 시아버지는
하필 일본여자를 며느리로 맞아야 하냐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아버지는 일제강점기때 징용으로 끌려가서 이와테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한 분이셨습니다
어찌나 일이 힘들었던지 죽음을 무릎쓰고 탄광을 탈출한 그분은 시모노세키까지 몇십일을 걸어가서
부산가는 배를 얻어타고 가까스로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본에 대한 증오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아들에게 이불효 막심한놈 족보에서 당장 빼버릴테니 우리집에서 일본여자를 데리고 나가 살든지 죽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태도가 강경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뜻대로 결혼을 하고 낙안에 있는 고향집으로 신부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대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아들부부를 받아들인 후에도 며느리를 향한 구박이
계속 되었습니다
며느리가 힘들어 할때마다 " 너희가 나한테 한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럴줄 모르고 우리집에 시집을 왔느냐 ?"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또 시아버지는 명절에 온가족이 모일때마다 일본 며느리를 곁에 앉혀놓고 이와테 탄광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또했습니다
그때마다 며느리는 " 아버님 제가 일본을 대신하여 사죄드립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가즈꼬 언니는 시아버지의 한풀이가 계속되는 동안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한없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렇게 10년쯤 지난 후에야 시아버지는 며느리에 대한 박대를 멈추었고 차가운 태도가 누그러 들며 며느리를 예뻐하는 모습에 놀란 식구들이 물었습니다
" 아니 요즘엔 며느리한테 그렇게 다정하세요 밉지 않으세요?"
" 이젠 안미워
내 마음속에 쌓였던 한이 다 풀렸거든
그동안 나는 며느리를 미워한 것이 아니야 !
징용가서 쌓인 한을 괜히 며느리에게 퍼부은 거지
이 아이 덕분에 내 한이 다 풀렸어
이제부터는 내 며느리니까 예뻐해야지"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참 울컥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언니가 대신 속죄를 했구나 싶기도 하고
잘 견디고 이겨낸 가즈꼬 언니가 대견했습니다
저 일본이 가즈꼬 언니같이 한국에 대해 속죄를 한다면 어떨지....
이젠 아픈 역사가
자꾸 먼이야기가 되고 희석되어지는 현실이지만 내게 감동으로 다가온 언니의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일본 전역에 이르러 조선인 노동자가 징용된 작업장은 총 2679곳 조선인들은 군수공장 군 공사장 토목건축 석탄광산 금속광산 항만 운수작업장 삼림벌채장 집단농장 등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그중 대다수는 탄광에서 일했고
가장 험난하고 사고 발생률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12시간 넘게 고된 노동을 했고 그럼에도 수중에 들어온 월급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목숨을 잃어도 유골조차 제대로 이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