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예전에는 머리가 약간 벗어진 훤한 이마에
얼굴이 뿌옇게 살이 오르고
배가 나온 사람이면 사장님이라고 하면서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늘에 앉아 책상머리에서 펜대만 놀리는 사람은
땡볕에 그을리지 않고 비지땀을 흘리는 사람들이나
손톱 밑에 기름때가 새카만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달라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외모나 옷차림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첩첩 산골에서도 먹고 살만한 집에서는 대부분
자녀들을 서울로 유학을 시켰습니다.
빠르면 초등학교 4학년 때나 늦어도 5학년 2학기에는
서울로 보냈습니다.
서울에 집을 사서 친척 중에 나가서 일을 할 만한 사람을
가정부로 물색해서 살림을 하고 아이들 뒷수발을 하게하고
그럴 여유까지 안 되는 집에서는
어린 자녀를 하숙집에 맡기기는 마음이 안 놓여
대부분 친척집에 의탁하게 되고
농사지은 쌀이며 양념거리 채소 등을 대는 것으로
하숙비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물려받은 땅마지기 하나 없어 남의 땅이나 부치고 사는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꼴지게라도 질 만한 나이가 되면
기술이라도 배우라고 아는 사람에게 딸려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농사일이나 노동은
결코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
그 어떤 권위나 자긍심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자식만큼은 풀속에 머리 들이밀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허리라도 펴고 살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결심만이
그들의 휘어진 허리와 굳어서 굽이 생긴 발바닥으로
높은 교육열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자식들은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화이트칼라 즉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하기를 바라면서
고생을 낙으로 알고 살았다.
나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만은 나처럼 살지 말라는 한스러운 삶에서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한들 대리만족이었을 뿐
그 낙을 함께 누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전통가업이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박탈했고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가 대접받는 사회분위기는
이미 수저계급론의 불씨를 품고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는 했어도
행복으로 인도해 주는 이정표가 되지는 못했다.
무소유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면에서도
끝없는 자기계발의 욕구는 꿈틀거렸고
베이비부머로 상징되는 말초세대는
노후 준비를 위해 걱정을 안고 이선으로 물러나
세상이 변한 지금에도
너희들만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서글픈 유업의 상속자가 되어 있었다.